제인 오스틴을 읽는 100가지 방법

46. 제인 오스틴 주인공들을 꺼내 보는 날

by 제이오름
Gemini_Generated_Image_tvn611tvn611tvn6.png 캐서린 몰런드가 틸니 남매와 산책하는 가상의 이미지

살다보면 우울한 날이 있다. 집에 돌아와 텅 빈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창밖의 소나무를 보면서 멍을 때려도 쉽게 가시지 않는 우울함, 빨리 떨쳐내려고 한다. 방법은 제인 오스틴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떠올린다. 그녀들은 이럴 때 이런 말을 했었지. 이 사람을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눴지 등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우울함이 풀리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뭔가 풀리지 않는 날, 그래서 우울함이 깊게 밀려오는 날, 소파에 기대어 엘리자베스가 걸었던 펨벌리 영지를 떠올린다. 날씨는 화창한 5월의 어느 날로 하겠다. 산책로를 따라 산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산책하기 딱 좋은 날로 말이다. 비오는 날도 나름 좋아하지만, 드레스에 진흙이 묻는 비오는 날은 오늘 만은 사양하겠다. 펨벌리 영지는 낯선 영국의 풍경이 아닌 내 고향 제주의 풍경을 많이 닮아 있다. 고향의 따라비 오름에 올라서 바라 본 풍광은 흡사 엘리자베스 베넷이 펨벌리 영지를 봤을 때의 감동과 흡사했고, 에마가 나이틀리와 같이 걸어가던 산책길은 우리동네 고야동산으로 가던 길과 비슷했다. 아름다운 관목과 나무 울타리 등 적당히 저 멀리 풍경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그런 풍경 말이다.


펨벌리 산책로를 따라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그들은 나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베스가 내 어깨를 톡 만지더니, 굳이 위로를 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살아온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다. 가만 가만히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들려주는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소설이 끝나고 나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래 내가 오늘 느꼈던 우울함, 생각을 달리 하니 뭐 그리 중요하냐 싶다. 우주에서 보면 티끌보다 작은 것일 뿐.


울적함이 사라지니, 내 삶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인물들을 닮은 이들에 대해 더 풀어보고 싶다. 그들과 닮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려 한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니.


『오만과 편견』의 샬럿 루카스를 먼저 이야기하겠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콜린스 목사와의 현실적인 결혼을 선택했던 샬럿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가 오버랩된다. 배움에의 갈망이 컸지만 딸로 태어난데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전혀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꿈꿔 온 삶을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매일매일 베넷 부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허허 넘기면서 살아가는 베넷 씨의 모습은 아내에게서 수많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식들을 위한 사랑과 가정을 잘 지키겠다는 의지가 굳셌던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 단지 베넷 씨처럼 위트와 유머가 많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전혀 위트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베넷 씨 수준의 유머는 아니지만 가끔은 허를 찌르는 위트를 날리시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의 멘트에 꺼이꺼이 웃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가정을 잘 지킬 것이라는 베넷씨에 대한 믿음은 내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믿음과 유사하다.


흥미거리가 생기면 다른 일을 제쳐두고 우리집을 방문하여 마을의 소식을 전해주던 P 아주머니는 『이성과 감성』의 제닝스 부인을 많이 닮아 있다. 어머니와 P 아주머니의 대화는 늘 마을에서 어느 집 자식이 공부를 더 잘하는지, 대학을 누가 더 잘갔는지, 언덕배기 집의 딸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 결혼에서 누가 실패해서 혼자 사는지 등등의 이야기도 간혹 섞여 있었다. 제닝스 부인이 주변 사람들의 연애와 결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서 가끔은 사랑 이야기에 끼어들며 농담을 던지거나 상황을 부추기는 모습, 대시우드 부인의 딸들을 보면서 누가 더 결혼 상대로 좋은지 평하는 모습 등은 가끔은 주변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단순히 가벼운 인물이 아닌 이유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친절하고 인정이 많기 때문이다. P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분이 우리집에 방문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으며, 가끔은 그분의 오지랍도 어느정도 이해하기로 했다.


『노생거 사원』의 캐서린 몰런드가 이사벨라와 고딕 소설에 심취하여 나누는 대화는 중학교 시절 만났던 K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K 친구는 캐서린 몰런드를 많이 닮았다. 공부를 아주 잘하진 않았지만, K 친구는 틈만 나면 소설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소설 속 주인공들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다행히 K 친구에게는 이기적인 이사벨라는 없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면서 중학교 시절의 그 친구와 헤어지게 됐지만, 지금도 K 친구는 헨리 틸니 남매와 같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상상해 본다. 아니, 만났기를 기도해 본다. 그녀가 차근차근 쌓아 놓은 문학적 지식과 감수성을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면서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헨리 틸니 남매와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성과 감성』의 메리언을 빼놓으면 안되겠다. 남편의 사망으로 소박한 코티지로 이사하게 된 대시우드 부인과 세 딸들, 그 중에 메리언의 아픔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날 동네 언덕 산책길에 발목을 삐고 걸을 수 없었는데, 우연히 나타난 윌러비가 그녀를 안고 집으로 온다. 문을 열고 그가 등장했을 때 가족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메리언과 그의 만남은 사랑으로 발전될거라는 직감이 집안을 감돈다. 그런데 윌러비는 바람둥이였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니 결국 메리언을 배신하고 말았다. 메리언이 실연의 아픔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에게 지혜롭고 이성적인 언니 엘리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의 두 딸을 생각한다. 첫째가 동생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매일 매일 기도하고 있다. 만약 내 딸들 중의 하나가 에드워드 페라스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지지해 줄 수 있을까? 지극힌 현실적인 이유에서 흔쾌히 "Go!"는 아니다. 왜냐하면 에드워드 페라스의 어머니와 누나는 정말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이런 가족 구성원이 있는 집의 남자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말이다. 그렇다고 또 "No!"는 아니다.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엘리너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나르시스트인 소프(『노생거 사원』의 인물)같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시작하고 자랑으로 끝나는 소프, 진실된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소프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대신에 타인의 마음을 찬찬히 읽고 진정한 위로를 할 줄 아는『맨스필드 파크』의 에드먼드 같은 사람이나 현명하고 식견이 넓으면서 대화거리가 풍부한 틸니 남매와 같은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자신의 편견을 없애고 진실된 사랑의 힘을 믿게 된 다아시도 참 괜찮다. 살면서 오랫동안 쌓인 편견들 없애기 참 쉽지 않은데, 그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사람을 보는 눈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다아시는 이미 합격이다.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는 내 어릴적 모습과 닮은 점이 있어서 짠하게 느껴진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먼 조상이 어느날 내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갑자기 배움을 위해 먼 나라로 떠나는 상상 말이다. 혹은 『톰소여의 모험』에서 보물을 발견한 톰처럼 큰 재산으로 원하는 책을 읽고 하프처럼 멋있는 악기를 배우는 등, 꿈꿔왔던 삶을 살아가는 모습 말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패니는 부유한 이모부인 버트람 경의 집에서 살게 됐고, 자신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품위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어린 시절 살았던 포츠머스의 친정 집은 좁고 소란스럽다. 형제 자매가 많은 대가족이어서 패니가 마음편히 쉴 곳, 차분히 책을 읽을 공간이 전혀 없었다. 무능한 아버지 프라이스 씨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이런 집안 배경이었으니 패니 프라이스가 버트람 경 저택으로 보내진 것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질서를 주고 배움에 대한 기회도 줄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설득』에서 앤은 레이디 러셀의 설득으로 사랑하던 웬트워스 대령과 헤어진다. 삶에서 이런 경험 정말 많지 않은가. 사람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지 않을 때, 미래가 불투명할 때,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누군가가 집요하게 설득하면 그만 넘어가고 마는 일들 말이다. 그 설득이 옳은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서 앤은 생각이 많아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앤은 자신도 설득하는 힘을 보여준다. 친구인 하빌 대령과의 대화에서 여성의 사랑과 충실함이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지를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내 큰 딸이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잘 설득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아, 에마! 주변 사람들을 잘 알고 어느 정도 자신이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느끼는 에마 우드하우스, 산만하고,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고,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모습은 20대의 나와 닮아 있다. 세상과 부딪쳐서 철저히 깨져봤던 경험이 한쪽에 남아 있다. 그 경험이 작지 않으니 이 이야기는 따로 풀어내는게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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