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cience does make cowards of us all
"Conscience does make cowards of us all."
양심이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지.
위 대사는 『햄릿』 3막 1장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 중에 포함된 대사이다. 인간이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내면 갈등과 도덕적 고민 때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말 그대로의 양심이 아니라, 내면의 도덕적 판단, 반성, 고민, 성찰 등을 의미한다.
Thus conscience does make cowards of us all,
And thus the native hue of resolution
Is sicklied o’er with the pale cast of thought,
And enterprises of great pitch and moment
With this regard their currents turn awry
And lose the name of action.
이렇게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결단력은 생각이라는 창백한 빛에 물들어 병들고,
중요한 행동들조차 그 생각 때문에 방향을 틀어버리고,
결국 실행되지 못한 채 이름만 남게 된다.
『햄릿』은 덴마크 왕국을 배경으로 햄릿의 복수, 고뇌 이야기를 담은 비극이다. 햄릿의 아버지인 덴마크 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형인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른다. 왕비 거트루드가 클로디어스와 결혼하니 햄릿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버지가 죽은 것도 충격인데, 어머니마저 삼촌과 결혼한 상황이니 말이다. 어느날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나 왕을 독살한 것은 바로 클로디어스라고 밝혀 주고, 이에 햄릿은 복수를 다짐한다. 햄릿은 복수를 결심하지만, 도덕적, 철학적 고뇌에 빠지게 된다. "To be or not to be...,"라는 유명한 독백에서 보여주듯, 그는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과 도덕적 고 등으로 인해 그는 아버지의 복수 실행을 하지 못하고 깊은 방황을 하게 된다.
햄릿은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죄를 드러내기로 계획한다. 연극의 주제는 왕의 죽음이었고,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아버지를 독살한 장면을 재현한다. 연극이 상연되어 클로디어스는 불안해하면서 자리를 떠나는데, 이를 통해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클로디어스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를 죽일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햄릿은 제대로된 실행을 못하고 오히려 폴로니우스라는 사람을 죽이게 된다.
이 비극은 인간이 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가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고 있다. '나'안의 어떤 도덕적 결함 때문일 수도 있고,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 때문에도 결단하지 못할 수 있다. 사람이 갖고 있는 그 결함, 누군가는 그것을 우유부단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양심(도덕적 번뇌)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햄릿은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를 닮았다.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개츠비가 아닌 톰과 결혼하고, 닉은 그것이 자신의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벌어 그 사랑을 되찾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닉은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상황을 관찰하고 외부에서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다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준다.
우유부단하면서 도덕적 성찰이 강한 인물로서 햄릿을 살피다 보면 그가 '의심할 수 없는 것,' '확실한 것'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오필리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말라고 고백하고 있다.
Though the stars be burning,
though the sun be moving,
Though the truth may seem to be a lie,
Let not your love for me ever doubt."
별이 불덩이인 것을 의심하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의심하고,
진실이 거짓이 아닐까 의심할지라도,
나의 사랑만은 의심 마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별이 불덩이이고, 태양은 움직이며, 진실은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신한다. 오히려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의심하게 된다. 햄릿이 스스로 확신에 대한 집착을 공고히 할 수록 독자는 그가 확실하다고 하는 것이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과연 확실한 것이 있으며, 확실에 대한 집착이 삶에 유용하고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인지 다소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확신만을 쫓다보면 그것이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필리아에게 자신의 사랑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겠구나' 라는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다른 모든 것은 의심하고 주저하면서 오필리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 만큼은 확실하니 결코 의심하지 말라는 모순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가 비극적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우리도 이런 모순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생각에 이르면 어디선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제4악장 아다지에토가 흘러나오는 듯 하다.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정화되는 그 무엇 말이다.
햄릿이 궁정 광대였던 요릭의 해골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물론 이 구절은 삶의 덧없음, 죽음의 무상함 등을 의미하겠지만, 햄릿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광대는 이미 알고서 몸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다. 무대에서 광대가 보여준 몸짓과 익살, 재담은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인간 삶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좌중을 온통 웃음바다로 만들던 너의 익살, 껑충거리던 춤, 노래, 번쩍이던 재담은 이제 어디 있는가?"
확실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소 의연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현재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이겨내며, 좀 더 나은 상황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양심이라는 최소한의 도덕적 성찰은 매우 의미있는 가치이니, 그것을 고수하면서. 때로는 겁쟁이가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