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프리젠터가 브랜드컨설팅펌에 들어간 이유
최근 좀처럼 책을 읽을 수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만큼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눈 깜짝할 사이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끌었다. 나는 지금.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6년 간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해왔다. 식음회사에서 전문 프리젠터로서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보통 100장이 넘는 제안서를 10분 혹은 15분 안에 소위 말하는 '임팩트 있게' 전달하는 일이다. 전문 프리젠터인 내가 하는 일은 다음의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1) 전체 프레젠테이션의 핵심 메시지 잡기
2) 핵심 메시지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오프닝, 클로징 멘트 작성하기
3) 심사위원에 따라 전략적인 프레젠테이션 플로우 잡기
4) 청중 앞에서 발표하기
무대 위에 서기까지의 모든 과정. 핵심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편집(Edit)과 우리만의 전략적인 플로우(Flow) 만들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한 문장 한 문장 힘주어 말(Present)하는 일까지. 전문 프리젠터로서 6년 간 일을 해오면서 마치 나의 업에 방점을 찍듯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Story)'를 만드는 일이라고.
하나의 주제를 잡아 제한된 시간 안에 편집하여 전달하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와도 다르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가장 좋은 프리젠터는 '무대 위에서 전하는 모든 내용이 진짜 나(발표자)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기획은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잘 모르지만, 4년 동안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던 나에게 프레젠테이션 기획의 과정은 소설의 플로우를 짜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결과를 예감할 수 있는 '복선'이 나오고 '위기'가 나오고 '절정'으로 치달아 결국 '필연적인 결말'로 마무리가 되는. 하나의 스토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기획'이라는 말을 대신해 '스토리'라는 말로 그 모든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6년 간의 치열한 현장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홀로 유레카를 외치며 먼 훗날, '스토리'하면 '채자영'이라는 이름이 불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자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그때부터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정해졌지만 두 땅 위에서 두 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무슨 일을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책을 찾아 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교수님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직접 만나 자문을 얻기도 했으며 대학원을 이미 졸업한 분들을 만나 묻기도 했다. 작년 8월 SKT <행복인사이트>에서 전문 멘토와 유명멘토로 함께 코칭을 하면서 마주치게 된 김영하 작가님에게도 물었다.
혹시 스토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스토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은 녹록치 않았다. 김영하 작가님은 그런 책이 있다면 자신이 읽고 싶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사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영화'인데 영화를 배우러 대학원에 입학해 시나리오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나 국어국문학과의 전공을 이어 대학원에 들어가 스토리텔링에 대한 어떤 가설이나 이론을 발견해내는 것도 내 일은 아닌 듯 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렇게 둥둥 마음을 잡지 못하고 떠다니다가, 말의 본질을 배우고 싶어 찾아간 <한국 수사학회>에서 만난 서울대학교의 김헌 교수님이 마치 해답과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자영씨는 그저 지금의 자리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 듯 일을 이어가면 됩니다.
그게 자영씨만의 시(Poem)를 짓는 일이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댕- 하고 맞은 것 같았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지금의 일을, 가장 충실하게 해낼 것. 그래, 내가 해야할 역할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나만의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내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 보다 더욱 산업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스토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이다.
브랜드 스토리. 우리가 흔히 말하는 브랜드 스토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가장 쉽게, 일상에서 혹은 산업에서 자주 접하는 어색하지 않은 단어. 브랜드 스토리를 배우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그 당시 72초 TV의 CBO였던 우승우 부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슬램덩크 포에버: 2017년 만화 '슬램덩크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노우에 작가를 만나러 일본으로 찾아간 스토리펀딩 프로젝트>에서 우연히 만나 동네 아저씨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회식자리에서 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분 이 브랜드 업계에서 굉장히 뼈가 굵고 유명하다는 것을 어쩌 알았겠는가! 분명 간절히 바라니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브랜드살롱 Be my B라는 커뮤니티를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2주에 한 번 편안하고 느슨하게 B로 시작하는 것들을 브랜드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이다. 현재까지 시즌0/시즌1/시즌2에서 Be my B:aseball을 시작으로 book, bed, beer 등 벌써 1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는 커뮤니티이다. 2주에 한 번씩 브랜드에 관심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 안에서 하나 둘씩 어떤 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브랜딩이라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쌓아가고 짓는 일이라는 것. 특히나 브랜드에 대해 공부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나다움'이 아닐까 싶다. 대학생 시절,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듣는 단어인줄 알았는데 말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나다움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겐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약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곁에서 브랜드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에 시나브로 어떤 생각이 쌓이게 되었다. 브랜딩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과는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짓는 일'이구나. 라는.
지금 다시 돌아보면, 치열한 고민 끝에 불현듯 내가 왜 맘 속에 '브랜드 스토리'를 떠올리게 되었는지, 지금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이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왜'라고 묻던 질문에 오늘, 스스로에게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시 맘 속에 유레카를 외쳐본다.
결국, 내가 좋아하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세상에 전하는 일.
내가 지난 6년 간 전문 프리젠터로서 해오던 일과 브랜드 컨설턴트로서 해야 할 일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느낀 순간이다. 내가 좋아하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사람들이 가장 잘 알 수 있게, 편집하고 다듬어 세상에 전하는 일. 더 좋은 가치를 찾고 그것들을 온전하게 다른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그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는 일.
어쨌든 나는 이론보다는 실전으로 배워야하는 팔자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우승우 차상우 대표님과 함께 the. watermelon 이라는 브랜드 컨설팅 펌에서 2018년 4월 1일부터 함께 일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브랜드 스토리를 몸으로 부대끼며 배우는 곳. 매일 같이 브랜드적인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곳.
먼 훗날, '스토리'에 대해 자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며. 지금의 내 선택과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현실에 지치지 않고 내가 선택한 이 길을 겸허하게 걸어갈 것을 다짐하며. 오늘의 내 자리,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진우 작가의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니체가 학교를 다니던 1858년부터 교수직을 얻은 1868년까지 아홉 편의 자서전적 글을 썼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이 글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집약된다.
나는 어떻게 본래의 내가 되는가?
Wie man wird, was man ist.
How one becomes, what one is.
평생 잊지 말아야할 질문. 이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오늘도 더욱 본래의 나로 다가설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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