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단어를 보면 사전을 찾아본다. 사전적 의미, 그러니까 그 의미가 만들어질 때 처음 사람들이 생각한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도대체 왜 그 단어를 좋아했을까, 은연 중에 짐작했던 것들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낭만'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을 찾아본다. 낭만(浪漫). 물결 '낭'에 질펀할 '만'. 사전적 정의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현실에 메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아마 낭만이라는 뜻 안에는 물결이 질펀하게 흩어져 있는 모습. 마치 눈에 눈물을 머금었을 때처럼, 눈에 여울져 사물이 흐리멍덩하게 보이는 시선의 느낌이 담겨있는 듯하다. 현실을 명료한 시선으로 보지 않고 어느정도 흩뿌려진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사전적 정의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 문구가 유난히 눈에 거슬린다. '현실에 메이지 않고, 현실에 메이지 않고.' 몇 번을 속으로 되뇌어 본다. 현실에 메이지 않는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일까.
‘낭만’이라고 하면 삶에서 늘 함께 떠오르는 도시가 있다. 바로 'PARIS'라는 도시. 2016년 처음으로 유럽을 갔고, 그 유럽의 도시가 바로 파리였다. 늘 새로운 것, 반듯하고 때 타지 않은, 만들어지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물건만 좋다고 생각하던 서울의 내가 처음으로 과거의 시간이 그대로 축적되어 있는 파리에 간 것이다. 나에게 파리라는 도시는 바라만 봐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그야말로 ‘낭만적인’ 도시였다.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우리는 해가 뜨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가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으로 향했다. 해가 막 떠오르는 새벽녘, 나폴레옹이 만들었다는 개선문을 바라보며 그때 당시 그가 했던 생각을 되짚어 본다. 파리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충만한 낭만이 있었다.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안에서 현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박제된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과거의 모습. 과거라는 이름만으로 부를 수 없는 과거의 현재화. 파리에서는 우연히 길을 걷다 만지게 된 건물의 외벽도 100년이 넘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100년 전, 수많은 사람이 어루만졌을 그 벽을 2016년의 내가 만지고 있다니. 과거와 현재가 이질감 없이 조화되는 그 경험이 나에겐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파리가 그리울 때마다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본다. 일단 우디 앨런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영화의 초반 오프닝은 내가 보고 느꼈던 파리의 감상을 그 어느 영상보다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4분 정도 되는 짧은 영상 클립이지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는 우디앨런 특유의 무겁지 않은 화법으로 유쾌하게 진행된다.
길은 늘 자신의 현실이 불만족스럽다. 과거의 낭만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그가 파리를 사랑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느 날,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 길을 잃어버린 그에게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치고, 오래된 푸조 한 대가 나타나더니 그를 그렇게나 동경하던 과거 시대로 이끌고 간다. 길은 동경하고 꿈꾸던 시대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늘 현실을 부정하기만 하던 그는 그제서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다시, 자신의 현재로 돌아온다.
당신이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되는 거예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원래 그런 거니까.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뒤로 나에게 찾아온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래된 것, 시간을 지나며 견뎌온 것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의 풍파를 견디며 지금까지 생존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오랜 시간을 견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 쳐줄 가치가 있다는 것. 오래된 것이 마냥 낡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어서 그 나름의 새로운 무게감과 자신만의 또렷한 색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서 자취할 집을 구하는 도중 '신축'이라는 문구를 보고 찾아갔어요.
그리고 주인이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이 건물은 60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라고요.”
파리에서 오랜 시간 유학을 하고 있는 지인에게 듣고는 깔깔대며 웃었던 이야기다. 60년 밖에 되지 않은 건물. 웬만하면 100년을 넘어가는 건물이 수두룩한 파리에서는 60년 된 건물도 신축에 속하는 게다! 내가 느낀 파리의 매력은 과거를 동경하며 과거 속에 갇혀 사는 그런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꺼이 존중할 줄 알고 때때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여전히 간직한 채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삶에서 낭만이라는 단어의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 메이지 않고'의 진정한 의미를. 누군가는 불평 만하며 살아갈 수 있는 60년 된 건물이지만, 이것을 신축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말이다.
채자영
스토리디렉팅그룹 필로스토리 대표
이야기의 힘을 믿는 '스토리 덕후'입니다. 8년 째 기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메시지화하여 전달하는 국문학도 기획자이자, 못생기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예요.
* 왓챠플레이(WATCHAPLAY) 공식 브런치 코너 '취향공복엔 왓챠 브런치'에 기고한 칼럼의 원문 글입니다. 왓챠플레이팀에서 편집한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Dec 02. 2019
글 | 채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