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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자영 Apr 09. 2020

'거리두기'의 쓸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흐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또 연장되었다.


사실 조금, 절망적이다. 주변에 알고 지내던 프리랜서들의 일거리가 끊어지고 공간을 운영하던 사람들의 탄식이 더욱 커진다. 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일을 도모하고 작당하던 주변의 지인들이 이제는 좋아하는 일만으로는 생계가 이어지지 않을 만큼 말 그대로 '힘들게' 되어 버렸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요즘의 주 생활터전 우리집 '자영듀토피아' Photo by Kyala



나에겐 조금 먼저 찾아온 '거리두기'

현재 출산 후 약 50일. 나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임신이라는 축복과 함께 반 강제적으로 조금 더 일찍,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출산 전에는 아이를 위해, 출산 후에는 나를 위해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회에서 잠시 이탈하여 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늘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과 호흡하며 부지런떨던 나에게 이러한 강제적 휴식과 거리두기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혼자 멈춰있다는 그래서 결국 도태될 거라는 심리적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거리 두기’와 ‘쉼’이 어떤 의미인지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리두기[Distancing]
: 개인이 자신과 문제, 감정과 사고, 현실과 이상 등의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여 바라보는 현상



심리치료에서도 ‘거리두기’는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리치료에서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무의식적 감정과 생각을 다른 생각과 연결하여 자신을 객관화해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의 거리두기는 의식과 무의식, 의도와 의도하지 않음을 넘나들 수 있다. 마치 풍경을 바라볼 때 형상과 배경, 조화와 부조화, 질서와 무질서를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는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마치 풍경화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거리두기'의 쓸모

그렇다. '거리두기'는 그야말로 그동안 쉼없이 달려온 내가 나의 삶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늘 빠르게 돌아가던 세상과 함께하던 가쁜 숨을 잠시 고르고, 그동안 맺고 있던 관계들을 돌아보는 시간인 셈이다.


실제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약 2주간 지냈던 조리원에서는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내 안에 있던 다양한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감정들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보듬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스스로에겐 충만한 시간이 되었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외에도 나와 늘 함께하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코로나 19 상황으로 격리가 극심해진 병원에서는 출산을 하기 전까지 입원한 동안 남편의 얼굴을 하루에 1분도 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세상과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완전한 단절. 홀로 견뎌내는 그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고 음미하는 것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공기처럼 함께 해오던 사람들이 왜 나에게 소중했는지,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흐른다

작년 12월 오픈한 연남동의 공간 [기록상점]은 다른 여느 공간과 다르지 읺게 지난 3월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정지 상태다. 스토리텔러들을 위한 교류, 창작 공간으로 활용하던 공간이기에 필로스토리에서 가장 메인으로 진행하던 커뮤니티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함께하던 살롱이나 워크숍이 취소되거나 미뤄지고 랜선으로 변경되었다. 우리가 그 공간에서 하려고 했던 것들. 그러니까 우리와 가치관이 같고 결이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 그 일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조금 절망적이다.


스토리텔러를 위한 교류 창작 공간 [기록상점]의 풍경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고 우리의 일상은 흐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주변에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이들이 코로나19가 있기 전과 후,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이 긴긴 터널을 지난 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 [기록상점]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 맨숀이었던 곳. 그래서 작은 방들로 분리되고 나누어진 공간. 우리는 '거리두기 Distancing'이라는 주제 아래 [기록상점]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혼자 보낼 수 있는 낯선 공간이 필요할 때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리두기'를 통해 그동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관계를 다시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거리두기'의 기간 동안 조금은 낯선 공간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을 때, 홀로 조용히 차 한 잔 마시고 돌아갈 수 있는 곳. [기록상점]의 라이팅룸Writing Room은 홀로 보내기에 적당한 공간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다양한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홀로 조용히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는 곳, 기록의 방




'기록의 방, 낮과 밤'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혼자 보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매일 덩그러니 놓여진 공간을 소독하고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 이곳에 오면 동양가배관에서 내려주는 커피와 제철 식자재로 만든 간식 페어링 그리고 '거리두기 Distancing'이라는 주제로 큐레이션 되어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다.



Book Curation by Philostory

[Distancing]

한 걸음 물러선 '거리두기'를 통해 삶의 다양한 관계를 돌아봅니다.


일___________________삶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 김동조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세이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나___________________너


깨끗한 존경 | 이슬아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 정채찬


나___________________나


아무튼, 메무 | 정혜윤

자존가들 | 김지수




어떤 일이든지 간에 의미는 있다. 모든 세상이 정지된 이 때, 거리 두기의 쓸모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일과 삶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제일 중요한 나 스스로와의 관계. 하나의 풍경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시간.


 

2020년 4월 9일 (목)

글 | 채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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