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칭 포 슈가맨(2011)
이겨야 한다고 배웠다. 달리기에서 1등을 하면 칭찬을 받았고 가을 운동회에서는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상대편보다 먼저 박을 터뜨려야 했고, 백일장에서는 누군가보다 글을 잘 써야 상을 받고 박수를 받았다. 늘,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성장하는 기쁨보다 누군가를 제치고 이겨낸 뒤에 얻는 승리의 희열을 먼저 배웠다. 그렇게 나 그리고 우리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에 아주 적절한 인재로 자라났다.
늘, 누군가와 함께 나란히 성장하는 기쁨보다
누군가를 제치고 이겨낸 뒤에 얻는 승리의 희열을 먼저 배웠다.
어른이 되고 이 경쟁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치열해졌다. 어릴 적엔 어른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면 이제는 진짜 생존 경쟁이었다. 회사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거나 실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되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열등감에 휩싸였고 누군가는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타인을 깍아내리려 노력했다. 함께 응원하고 좋은 일에 진심으로 기뻐하기보다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자책하는 우울함이 온 사회를 감돌고 있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직장에서 늘 함께하는 사람조차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동료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시스템에 조용히 메말라 가고 있었다.
시간 여행자, 탑골 지디라는 수식어의 한 뮤지션이 연일 화제다. 그의 이름은 양준일. 이제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재미교포라는 편견으로 마음껏 꿈을 펼치지 못하고 흡사 추방되듯 떠나야했던 젊은 뮤지션. 연애 기획사라는 곳이 말하는 성공 공식에 맞춰 근육질의 몸매를 만들고 짧은 머리를 한, 자신의 모습을 모두 버린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연약했던 한 사람. 하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 제 앞에 있는 삶을 충실히 받아들이며 노동자로 살아온 그를 수소문 끝에 찾을 수 있었고 끈질긴 설득 끝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슈가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난 그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영상 속에서 젊은이의 모습으로 해맑게 웃던 그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힌 채 50대의 나이로 다시 무대 위에 올랐다. 섬세한 손짓과 무대 위를 마음껏 가누는 그의 몸짓은 말하고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변한 것은 다만, 우리였다.
과거에는 치열한 경쟁자로 살아가기만 해도, 사회가 원하는 적당한 위치에 오르기만 해도, 보장된 성공이 눈 앞에 있었다. 성공한 중산층 가정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핸드폰과 자동차, 그리고 집까지.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사라졌다. 경쟁해서 꼭대기에 올라가봤자 퇴직 날만 더욱 빠르게 다가왔고 어린시절 누군가의 성공은 시기 질투의 악플로 그 댓가를 치루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잠깐 멈춰서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우리는 경쟁해야하는가.
양준일이라는 사람을 다시 찾아낸 예능 프로그램 <슈가맨>은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영화를 오마주한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영화와 같은 일이 우리 눈 앞에 일어난 것이다.
라틴계 미국인이라는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반항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 미국에서는 단 10장의 앨범도 판매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음유시인, 로드리게즈. 하지만 그는 지구 반대편인 남아공에서 롤링스톤이나 엘비스프레슬리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수백만장의 앨범이 팔리고 남아공의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음악을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럼에도 아무도 로드리게즈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급기야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남아공의 한 팬은 이 미스터리한 뮤지션을 찾아나서기로 한다. 드디어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남아공 사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상상과 달랐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노동자의 자리에서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남아공에서 자신의 노래가 불리고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드게리즈는 그런 사실을 안 뒤에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그 역시, 변한 것은 없었다.
그는 남들과 다르게 일을 바라봤어요. 마치 중요한 의식처럼 엄숙하게 대했죠. 이 지저분한 일을 8-10시간씩 하면서도 그는 진정한 시인이나 예술가만이 지닌 신비한 힘으로 주변에 널린 흔하고 평범한 것. 속되고 비루한 것들을 탈바꿈 시켰어요. 예술가란 바로 선구자죠. 음악적 희망은 꺾였어도 그의 정신은 남아 새로운 곳을 찾으며 나아가기 위한 길을 닦았어요.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중-
로드리게즈 혹은 양준일을 보면서 우리는 왜 열광하는가.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타인과 경쟁해서 더 높이, 더 넓게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든 크게 동요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자신 앞의 생을 살아가는 자. 더 높은 성공을 위해서는 기꺼이 남을 짓밟고 비하하고 외면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숭고하게 눈 앞의 노동을 해내는 자. 그들은 마치 이 시대에 나타난 현자처럼 그저 단단하게 눈 앞의 생을 살아간다.
사회 속 신화가 만들어낸 소수 혹은 약자에 대한 폭력,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성공신화에 대한 물음. 그들은 숭고하고 예술가적인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온전한 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의 양준일보다 지금의 양준일을 사랑한다고. 어쩌면 한국의 치열한 경쟁사회 속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였던 그는 진흙탕 같은 사회 속에서도 때묻지 않고 여전히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소신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많던 고통과 고뇌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모습에 새로운 희망을 본다.
우리는 여전히 궁금하다. 통장에 돈이 얼마가 있든지 간에 삶을 진실로 대하는 태도만 있다면 진정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지.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믿음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조금의 과잉도 없고 경제적이 아닌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흙탕 속 진주와 같은 또 다른 ‘슈가맨’의 이야기를.
채자영
스토리디렉팅그룹 필로스토리 대표
이야기의 힘을 믿는 '스토리 덕후'입니다. 8년 째 기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메시지화하여 전달하는 국문학도 기획자이자, 못생기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예요.
* 왓챠플레이(WATCHAPLAY) 공식 브런치 코너 '취향공복엔 왓챠 브런치'에 기고한 칼럼의 원문 글입니다. 왓챠플레이팀에서 편집한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Feb 06. 2020
글 | 채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