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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ssie Feb 05. 2020

커리어의 8할은 카드값, 위로의 8할은 정세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야 할 도시의 조각들을 위로하는 문장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무슨 말을 할지 모를 때면 좋아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오늘은 별 생각 없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날이네요. 괜히 잘 쓰지 않는 존댓말로요.


책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고를 때는 두근거리고, 사서 손에 쥐면 기대가 되고, 읽기 시작하면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으며 문장을 수집하고, 읽고 나면 책꽂이에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해 꽂아두면 뿌듯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로를 책에서 받습니다. 그래서 침대 주위에 늘 책을 둡니다. 침대 헤드 책꽂이에는 시집들이, 누워서 손을 뻗으면 닿는 위치에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늘 읽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인테리어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루의 끝에 누웠을 때 어쩐지 서럽다면, 손을 뻗어 위로를 구합니다.



최근 가장 많은 위로를 준 건 정세랑 작가의 책들입니다. 같은 시대에서 그가 쓰는 글들을 읽을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커리어의 8할이 카드값이라면, 위로의 8할은 정세랑 작가입니다.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도시의 조각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부서지지 않게 위로하는 정세랑 작가의 문장들을 나눠보려 합니다. 문장에 위로를 받으셨다면, 책을 구매해서 더 많은 위로와 재미를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정세랑 월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우니까요.



뭔가 좀 잘못 걸린 것 같아. 안 맞는 사람들한테 걸린 것 같아.
다른 데 갔더라면 괜찮았을까. 내가 문제인가.

-이만큼 가까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인으로, 독립적인 경제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며, 간절히 유지하고 싶은 상태이다. 그러니 이렇게 가끔씩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오늘은 괜찮은가, 이번주는 괜찮은가 꼼지락꼼지락거려보는 것이다. 원전폐기물 보관함처럼, 위태롭지만 조용하게. 엉망인 내부를 숨기면서 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덧니가 보고 싶어


거짓된 평판이란 건 거품을 끼고 데굴데굴 몸을 더 키워서 어느새 경력이 된다.
남들도 다 그렇게 지내는 것 같아서 나도 가만있었다. 정말로 실력파인 것처럼.

-이만큼 가까이


"처음 좋아하게 된 걸 계속 좋아하지 않게 되어도, 다음 걸 또 찾으면 돼요."

-피프티피플, '서연모'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피프티피플, '김인지 오수지 박현지'


왜 기분이 염소 같아?

다들 착한 양처럼 순하고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데
나만 그 사이에 낀 염소처럼 고집을 부리고 이것저것 결정하려 들어. 

-이만큼 가까이


그래, 똑똑한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
똑똑해서 안 듣는지도 모른다.

-피프티피플, '서진곤'


“낙하산이 허세만으로 높은 자리를 꿰차는 일이 허다해.
막상 진짜 일하는 사람들은 매출 다 올리고도 욕만 먹고.”
“그런 건 어디나 그렇지 않을까?”

“가까이 가서 귀에다 소곤거려 주고 싶어.”
“뭐라고?”
“너 같은 건 가짜라고.”
“으악.”

“오래오래 살아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다 몰락하는 걸 보고 죽고 싶다.”
“지독한 말을 잘도 하네.”

“자꾸 사람들이 나보고 성질 좀 죽이라는데, 그런 사람들이랑은 말이 안 통해.
성질 죽이면 아무도 안 지켜준다는 걸 왜 몰라.”

-이만큼 가까이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피프티피플, '이설아'


"너 나랑 내 러시아 여자친구랑 한번 안 만날래?"

최 피디가 손등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되도 않는 쓰리섬을 제안했을 때, 나는 화도 내지 못했어. 그런 수모를 당하려고 졸업과 취업의 혹독함을 견딘 건 아니었는데.

-옥상에서 만나요, '옥상에서 만나요'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 끝까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더라고요, 재수 없어. 저는 고함을 지르다가 조금 울었습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재소자 500명 중에 470명이 남성인 것에 대해서도 의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고민했다.

-피프티피플, '이동열'


심장은 가슴 한가운데에 있다. 아주 약간만 왼쪽인데, 심장이 멎을 때 심실을 자극하기 위해 왼 가슴을 압박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착각하고 만다. 실제 심장은 이렇게나 가운데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상실감 때문에 명치가 아프다면, 위나 다른 곳이 아픈 게 아니다. 정말 심장이다. 상심(傷心)이란 말을 매일 다시 배우며 산다.

-이만큼 가까이


악의란 것은 평소엔 잘 숨어 있으니까.
자세히 봐야 괴물 얼굴이 보이는 벽지 무늬처럼.

-이만큼 가까이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피프티피플, '조희락'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므로 권위에 있어서는 지금 거론되는 권위가 진짜인지 아닌지 자주 따져봐야 할 일이다.
-이만큼 가까이


요즘은 아무도 큰 회사에서 평생 일하지 못하니 처음부터 틈새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아름다운 틈새, 연모를 위한 틈새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작은 집을 짓고 싶어. 연모는 생각했다.

-피프티피플, 서연모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피프티피플, '소현재'


수미의 저 상처도 그런 흰 선으로 잘 아물까.
그렇게 가늘고 희미하게 아물기 전에 다시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만큼 가까이


아르바이트가 세개면 어떻게든 잠들어야 하기 때문에 한두가지 방법을 체득했어.
아무 상관이 없는 단어들을 연달아 생각하면 다시 잠들 수 있을 때가 있어.

-옥상에서 만나요, '효진'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지만, 모두 결국은 거절당하는 법을 배운다.
예쁜 여자애에게 거절당하기도 하고 공부에 당하기도 하고 재능과 미래에 당하기도 하고......

-이만큼 가까이


그러나 사실 불운은 늘 기분 나쁘게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잊으면 말도 안되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우리를 환기시킨다.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만큼 널 흔들어놓을 수 있어. 쉽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이만큼 가까이


내 생각에, 인간이란 종은 아주 가끔을 빼곤 좀처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생물이 아냐.

-이만큼 가까이


노동자와 여성과 모든 소수자들의 편에 서겠다는 건 완전히 동의하는데, 왜 난 함께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안 생기지? 왜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게 싫을까. 왜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폭력적이냐는 말이야.

-이만큼 가까이


진보적인 사람들도 가짜가 넘쳐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에겐 누군가 편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절반쯤 불순물이 섞여든다 해도 조직이 필요하고.

-이만큼 가까이


온갖 고장난 부분들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서 그 불안을 가지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
병든 부분을 오려서 모빌처럼 바람에 흔들리게 해.

-이만큼 가까이


이야기할 수 없는 게 계속 많아져서 나는 결국 건강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이만큼 가까이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이만큼 가까이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으며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이만큼 가까이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 명 중의 한 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 씨는 그 한 명 쪽이에요.
혜정 씨를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함께 점심을 먹을 때가 하루 중 제일 나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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