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차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꽤 많이 접해봤다. 하루살이처럼 전날에 닥쳐서 수업을 준비했지만,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준비가 안되면 초과 근무를 달지 못하는 교사의 현실에도 깜깜한 학교에 남아 수업을 준비하기 일쑤였다. 매번 이렇게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며 일찍 퇴근하던 옆 반 동료는 "다 자기만족이에요. 애들은 몰라요. 얼른 퇴근해요."라고 나름 나를 위한다는 그 말이 비아냥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큼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나날을 보내왔다.
첫째 출산 예정일 1주일 전까지도 매일 뱃속의 아이에게 "오늘 엄마랑 같이 학교 가자."라고 말하며 출근했고, 동료 선생님들과는 그림책 모임을 하며 태교를 했고, 육아서들을 찾아 읽으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에 대한 나름의 감각을 키워왔다고 자부했다.
초등학생을 경험해 본 게 과연 신생아 육아에 도움이 됐을까?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초등학생과 신생아의 간극은 어마어마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왔던 10년가까운 세월은 현실 육아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고 금세 초라해졌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먹고 자는 삶을 살아오다가나의 단순한 의식주에 대한 욕구조차 사치가 되는, 아이가 중심이 되는 삶이 시작되었다.
매일이 충격의 나날이었다.
#아이를어떻게안아야할지도몰랐다
나는 신생아 아니, 미취학 아동은 최근 몇 년 간 구경도 못해 봤던 터라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부터가 초보 엄마에게는 어려웠다.
엄마인 나도 아이를 어떻게 안아줄지부터를 고민하고 있는데 녹(남편)이라고는 쉬웠을까. 연두가 신생아 시절 우리 부부가 연두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아이를 편안하게 몸에 기대고 안고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신줏단지를 모시듯 두 팔로 안아 들고 있는 모습들이 있어서 지금 보면 ‘왜 애를 저렇게 안고 있어?’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초모 부모 티를 팍팍 내며 조리원을 퇴소하자마자 우왕좌왕 육아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유독 허약한 몸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꿈꾸던 자연분만 실패로 인한 좌절이 모유수유만큼은 성공하고 싶은 의지로 피어올랐다. 제왕 절개 수술을 해서 몸 회복이 더딘 데다 모유수유를 강행하느라 이맘때 내 모습을 거울에서 볼 때마다 생기 없는 모습에 흠칫 놀라곤 했다.
거기에 아이는 기가 막히게 내가 초보 엄마라 서툰 것을 알아차렸다. 정부지원 산우도우미 분이 퇴근하고 난 후, 몸속에 시계가 있는 것처럼 저녁 7시마다 얼굴이 새빨간 홍당무가 되며 울기 시작했다. 저러다 숨을 못 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었다. 이렇게 저렇게 안아주고 모유를 먹이려고 해도 울기만 했다. 영아 산통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하루 중 유독 내가 혼자 아이를 돌보는 시작하는 시간에 그랬던 것을 보면 아이는 뭔가 불편했고, 초보 엄마는 그 사인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나 서투른 엄마도 조금씩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34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이를 제때 최대한 먹이고 트림 소리가 날 때까지 한참을 등을 두들겨 주고 예쁜 노란색 응가가 아니면 무슨 일일까 걱정되어 응가 색깔의 의미를 알아보고, 아기의 건조한 피부가 아토피로 진행될까 싶어 수시로 엄마인 나는 로션을 못 발랐어도 아이에게는 수시로 크림을 발라주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나에게 살아있는 육아 노하우를 준 것은 그동안 열심히 읽은 육아서가 아닌 내 몸 회복을 위해 손을 빌린 산후도우미였다. 아이의 표정만 봐도 아이가 뭘 원하는지 착착 알아차리는 그분이 이 시기의 나에게는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이었다.
아이를 재울 때 사랑스러운 눈빛과 목소리로 안아주며 자장가를 불러주던 그 모습. 신생아였던 연두는 절대 기억 못 할 순간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자장가를 들으며 나도 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산후도우미분이 계시던 2주 시간은 금세 끝났지만 아이를 키우는 내내 수도 없이 불렀던 자장가는 아이에게 불러주는 노래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가 되어갔다.
#동생의퇴근을기다리다
산후도우미 분이 가고부터는 아이와 고군분투의 시간을 홀로 마주했다. 하루 종일 아이랑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하는 생활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외로웠다. 코로나가 절정이던 때라 몇 명 이상 모이는 게 금지이던 시절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그 어디에도 가기가 조심스러웠다.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가느라 바쁜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어른의 언어가 필요했다. 아이를 돌보며 가장 기다렸던 하루 일과인 녹의 퇴근은 야속하게도 야금야금 늦어졌다.
그래도 나에게는 비빌 언덕이 있었다. 함께 살던 내 동생 덕분에 나는 보통의 엄마와 달리 남편의 퇴근이 아닌 동생의 퇴근을 그렇게 기다렸다. 동생의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도 모르게 시계를 계속 봤다. 8시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좀만 버티면 돼.’를 연발했다. 연두를 유모차에 태우고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는 연두를 유모차에 태워 퇴근하는 동생을 버스정류장으로 데리러 가는 게 낙이었다.
동생이 퇴근하면 함께 저녁을 챙겨 먹었다. 동생 퇴근 전에 밥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려 함께 밥을 먹었다. 함께 먹으니 혼자 대충 먹지 않았다. 밥을 먹고 설거지도 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동생과 마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밥을 먹고 나면 긴장의 끈을 순식간에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동생과 아이를 두고 먼저 잠에 스르르 빠져드는 날이 자주 이어졌다.
다행히 이해심이 남다른 동생은 말하지 않아도 내 얼굴만 보고도 그날의 육아가 고단함을 알아차렸다. 먼저 잠들기 일쑤인 언니를 탓하기보다 말도 안 통하는 조카랑 놀아주고 재워주는 날이 참 많았다. 아이를 돌보는 게 이렇게까지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아이를 낳을 때까지 짐작 못했던 나와는 달리, 동생은 결혼도 안했는데 육아의 매운맛을 호되게 경험했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 키우기가 겁난다며 아이를 안 가지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이 낳기 1주일 전까지도 만삭의 몸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했던 내가 이렇게 이 세상에 아이랑 나만 있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줄이야. 이때가 코로나가 한참이던 시기라 유독 더 그랬던 것 같다.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만 가도 무슨 일이 생기려나 벌벌 떨며 50일도 안 된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며 뜯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외출하던 시기였다.
나의 육아 터널을 지나며 잘 해내고 싶은 그 마음과는 달리 잘 따라주지 않는 허약한 육체의 굴레로 지쳐가며 어두워지려 하는 순간, 매일의 어둠을 끊어준 동생의 퇴근이 있었다. 집 안에 남편 외의 어른이 있다는 것, 동생과 함께했던 신혼을 결정한 것. 이것은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