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공무원 수험생이 되었어요.
휴직을 하면 금방 좋아질 거란 정신과 선생님의 말은 사실이었다. 병의 원인이었던 직장과 단절되자 불안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운동을 병행하니 며칠 만에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엔 더 이상 약을 찾지 않게 되었다.
혹시나 불안장애,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경우에는 병가나 질병휴직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토요일 오전에 정신과 진료라도 받아야 한다. 나의 경우 만성적으로 깊어지는 부정적인 생각의 위험성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고, 마음의 안정을 아내와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병을 의식할수록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져서 실수가 더 크게 발생했던 것 같다. 이럴 때 쓰라고 병가, 휴직 제도가 있는 것인데, 주변의 시선을 우려하여 제때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매일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전화기는 조용하다. 휴직이지만 실질적인 퇴직을 해버리니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느낌이다. 모든 직장이 다 그렇겠지만 내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서 일을 잘했더라도 퇴직 후에는 친하게 지냈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불편하다. 전직 공무원이라는 특성이 현직 공무원과의 만남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간혹 안부를 물으며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하자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은 정말이지 고맙다. 이분들과의 인연은 소중히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문득 드는 생각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느낀 세상은 우주였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미세한 세포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내가 비운 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으로 메워지고 며칠만 지나도 기억에서 소멸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휴직만 한다면 직장에서의 모든 시간을 내 시간으로 쓰겠다던 각오와 달리 금방 나태해졌다. 분명 시간이 많아졌는데, 시간이 없다. 그러니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 생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대서 오는 불안감이다. 강아지에게 “기다려”라고 하면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런 느낌일까. 일이 싫어서 휴직을 했는데 일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모습이 모순적이다. 휴직을 생각한다면 휴직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목표와 루틴을 세밀하게 짜놓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이라는 게 하루의 긍정적인 긴장감을 유지시켜 주는 좋은 루틴 도구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니 남겨진 숙제가 떠오른다. 휴직 기간인 6개월 안에 이직할 직장을 찾는 것이다. 공무원이 싫어서 휴직을 했음에도 자연스레 나라일터(공직 채용정보 사이트)에 손이 간다. 알바천국과 사람인도 검색해 보지만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려지지 않아 지원이 망설여진다. 나라일터에서 올라오는 공직들은 직위명만 들어도 어떤 일인지 상상이 되어 마음이 편하다. 새삼스레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말에 공감된다. 사실 나는 퇴직까지는 얼떨결에 성공했지만 민간회사에 들어갈 용기까지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새 직장을 구하며 단 하나의 기준만을 세웠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오직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직장이면 된다. 최악의 경우 공무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무직은 민간인 신분으로 공공기관에 근무하며 공무원을 보조하는 업무를 담당하는데, 공무원보다 처우는 다소 떨어지지만 업무의 난이도나 책임감은 훨씬 덜하다. 이것저것 지원해 보다 안되면 공무직으로 일하며 질릴 때까지 글이나 쓸 참이었다. 찾아보니 도서관 관리직과 청사 관리직이 눈에 띈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중간에 사색할 시간도 많을 것 같다. 어차피 하루 8시간을 근무한다면 공무원이나 공무직이나 월급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고, 오래 다닐 것 같진 않으니 천천히 다음 직장을 준비하면 될 것 같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이직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뭐라고? 4시 반에 퇴근하는 공무원이 있다고?
응. 교육청 공무원 중에서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4시 반에 퇴근한대.
그중에 시설관리직 공무원은 건축 전공자가 갈 수 있다고 하던대?
너는 시간이 많은 직업을 원하잖아. 내 생각엔 이게 딱인 것 같아.
다 좋은데 임용고시에 합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그런데 시설관리직은 시설분야 자격증을 갖추고 한국사, 사회 두 과목만 준비하면 된대.
넌 이미 자격증이 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봤으니까 한국사는 잘 알 거고, 사회만 준비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시설관리직은 혼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대. 야근은 더욱 없을 거고. 한 번 생각해 봐.
알아보니 교육청 시설관리직 공무원은 옛날 학교 소사업무가 발전된 형태로 대부분 혼자서 일하기에 대인관계로 인한 문제가 없으며, 야근도 없어서 일찍 퇴근해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2년 정도 시설관리 업무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지 대충 느낌이 왔다. 또한 7급 9호봉에서 9급 11호봉으로 내려가도 월급은 30만 원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각종 수당도 줄긴 하지만 매일 저녁 10시에 퇴근하다가 4시 반에 퇴근하는 시간적 여유에 비할 바는 아니다. 시험일까지는 두 달 정도 남았다. 바로 인터넷 강의를 구매해서 스터디카페로 갔다.
퇴직 예정인 현직 공무원이 수험생들 무리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