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따윈 개나 줘버려
오늘은 8년간 공직생활의 마지막 회식 날이다. 직렬 선배에게 퇴직 의사를 밝혔더니 나를 위해 모든 건축직 공무원 동료들이 참석하는 회식을 열어주었다. 떨려서 퇴직 인사를 못할까봐 대본을 미리 적었다.
마지막 모습만큼은 멋있고 싶었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셔츠에 정장을 걸치고 머리를 정돈한 후 회식 장소로 나섰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불편한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멀리서 과장님과 동료 직원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곤 몰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들어갔다.
들어가서 과장님, 팀장님들께 멋쩍은 인사를 건네자 불편한 기색으로 인사를 받으며 한 마디씩 건넨다.
너 퇴직한다며. 근데 왜 질병휴직을 해?
몸이 많이 안 좋아? 뭐 안 좋은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전체적으로 나를 보는 시선들이 좋지 않았다. 병인(病人)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경멸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확실히 불청객이었다. 쏟아지는 질문들에 얼버무려 대답하곤 구석에서 가시방석에 앉은 듯 굳어있었다. 곧 회식이 시작되고 발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퇴직이 확정되지 않은 휴직 상태여서 그런지 내 발언권은 없었다. 식이 끝나고 10분 정도 눈치를 보다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밖으로 나왔다. 씁쓸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회식이라며. 마지막 인사 잘했어?
아니. 식 중에 내 발언권이 없던데?
다들 날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고, 나도 불청객처럼 느껴져서 그냥 나왔어.
뭐라고? 야.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집에 가면 후회하지 않겠어?
그러면 너 다음번 회식 때 또 나와서 인사할 거야?
아니. 나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왔어. 다시 갈 생각은 없어.
그러면 인사는 하고 가야지.
이 자리가 너한테는 공직생활의 마지막이면서 새로운 시작점인데, 실패의 기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순 없잖아. 이렇게 집으로 가버리면 평생 실패의 기억이 널 괴롭힐 거야. 다시 들어가서 인사하는 게 어때?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야.
어깨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인사하고 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한테 부끄럽지 않게.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네. 내가 잘못한 게 없잖아!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해?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조언 고마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바로 회식장으로 돌아가 회식 진행을 담당한 총무에게 말했다.
선배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는 모든 분들께 퇴직 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식은 끝났지만 발언권을 주십시오. 저는 이 자리가 공직생활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니 총무가 과장에게 보고 후 발언 기회를 주었다. 화가 나서인지 취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걱정과는 달리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금 비록 질병휴직에 들어가지만 6개월 안에 퇴직합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후배님들의 도움 덕분에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갑니다.
앞으로도 인연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내친김에 건배사도 했다.
퇴직인사를 마치자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룬 느낌이 들었다. 정말 짜릿했다. 움츠려 들었던 어깨는 자연스레 펴졌고 심장박동은 잦아들었다. 이 자리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 찰나에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아.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구나!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현실이 천국도 지옥도 될 수 있구나.
당장 눈앞에 짜인 판이 내게 불리해 보이더라도 겁먹지 않고 뛰어들면 이길 수 있구나.
여차하면 판을 엎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구나.
그 후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고, 그동안 나를 도와주셨던 분들께 한 분씩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처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발언 후에는 많은 동료들이 옆으로 와서 앞날을 응원해 주며, 퇴직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약점을 극복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처음에는 팀장님 한 분께 퇴직을 말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수십 명 앞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놀라운 경험은 친구의 말대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문득 그들이 왜 불편한 시선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들은 나로 인해 젊은 날에 하지 못했던 선택에 대한 후회를 느낀 것은 아닐까?
내가 그들이 평생 지켜온 가치를 너무나 쉽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닐까?
내가 이 견고한 조직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