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의 순간은 좋아하는 일을 찾았을 때 올 거예요.
퇴직을 결심하니 돈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무턱대고 퇴직했다가 실패할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채 꿈만을 쫓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애 구간별로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며, 현실적인 모범답안은 명예퇴직이라 판단했다.
명예퇴직이란 공무원으로 20년 이상 근속(勤續)한 사람이 정년 전에 스스로 퇴직하는 경우를 말하며, 정년 잔여기간에 따라 명예퇴직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의 재직기간 8년에 군 복무기간 3년을 합산하면 11년이 되고, 명예퇴직 의무 재직기간인 20년을 채우기 위해서는 9년을 더 일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3년만 더 근무하고 3년간의 육아휴직을 쓴다면 어떨까?
육아휴직 종료 후 퇴직까지의 잔여기간이 3년밖에 남지 않는다.
3년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이면 꿀 같은 휴직에 또다시 3년이면 이 생활도 끝인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휴직 전 3년은 ‘휴직 기간 동안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간’으로, 휴직 기간 3년은 ‘모든 면에서 성장하여 자아를 확립하는 기간’으로, 퇴직 전 마지막 3년은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간’으로 삼을 것이라 정했다. 내친김에 휴직을 위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해 본다.
방법은 간단하다. 육아휴직 후 최초 1년 동안 지급되는 육아휴직 수당을 감안하여 3년간의 총생활비를 구한 다음 36개월로 나누면 매월 모아야 할 금액이 나온다. 나의 경우 총금액 7000만 원, 월 200만 원 정도로 계산되었다.
휴직 기간 중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공무원은 원칙적으로 공무 이외의 다른 직무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지방공무원법 제56조) 단, 일부 영리 활동은 겸직허가를 받으면 가능하나 제약이 많다.(지방공무원 복무규정 제11조) 현실적으로 저술, 번역, 서적 출판, 작사·작곡 등 창조적 활동이나 블로그, 유튜브, 그리고 직무와 관련 없는 외부강의 등이 아니면 사실상 겸직이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계획이라고 할 것은 세 가지밖에 없다.
첫 번째,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한다.
두 번째, 적극적인 투자활동을 병행한다.
세 번째, 겸직허가를 받아 겸업이 가능한 영리 활동을 시작한다.
저축만으로는 필요금액을 모으기 어렵고, 저축한 돈을 어느 정도 변동성 있는 자산에 투자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더불어 겸업도 병행한다면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단, 퇴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시간과 돈을 교환하는 노동이 아니라 경험이나 데이터를 축적해 나가는 노동이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할 길은 ‘자본소득 + 반 근로소득’이며. 최종적으로는 자본소득 또는 축적된 노동의 시스템화를 통해 마르지 않는 샘물, 즉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저축과 투자, 겸업을 모두 병행해야 한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시작하기도 전에 돈의 숫자에 겁먹지 말자. 7000만 원이 한 번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3년에 걸쳐서 필요한 것이다. 내가 가진 무기는 ‘시간’과 ‘레버리지’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거나 돈보다 큰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잃는 것은 없다.
7000만 원과 3년. 돈이 중요한가 시간이 중요한가?
내겐 7000만 원이라는 돈보다 3년이라는 시간이 수천 배 소중하다.
다음으로 명예퇴직하는 45세부터 65세까지의 계획을 세워본다.
다행스럽게도 명예퇴직을 하면 명예퇴직수당과 그간 매월 불입하였던 행정공제회 정산금이 약 2억 원 정도 나온다. 따라서 45세 퇴직 시점에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자산은 다른 저축액을 제외하고서도 최소 2억 원이며, 이 돈을 연금 수급 개시일인 65세까지 20년간의 안전장치로 삼을 수 있겠다.
이 2억 원으로 투자를 해도 좋고 20년 동안 분할상환받더라도 한 달에 83만 원은 나온다. 거기다 지난 9년 동안 준비해 왔으니 다른 직업으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좀 적게 벌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65세부터는 공무원 연금이 개시되며, 주택 담보대출이 만료되었을 것이기에 부족분은 주택연금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다. 아플 것을 대비해 보험도 미리 좀 들어놓고 자식들을 위해 주식이나 아파트도 한 채 사놓으면 좋겠다.
자, 이것이 나의 계획이다. 어떤가? 빈틈없는 계획으로 느껴지는가?
처음에는 이런 상상을 하면 퇴직이 금방 다가온 것 같은 느낌에 더 빈틈없이 세밀하게 다듬으려 노력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일을 적어가며 말이다. 일기장의 제목은 ‘공무원 퇴직일기, D-3650’으로 지었고 군 제대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날짜를 줄여나갔다.
하지만 금세 내 계산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내 모습을 보자. 육아휴직을 하기도 전에 퇴직했으니 고생해서 세운 계획이 한순간에 깨졌다. 오류는 미래의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빠른 성장을 이룰수록 생각은 더 빨리, 자주 변한다. 그렇기에 계획이란 현재의 상황에 맞게 세운 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것이지, 수치상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한 것은 계획이 아닌 계산이었다. 저런 계산으로는 갑작스러운 사고가 찾아왔을 때 대처할 방법이 없으며, 생각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더 좋은 생각과 가능성의 발생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것을 깨닫곤 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왜 틀 안에 나를 가두는가? ‘명예퇴직’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더 나은 생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3650일이라는 절대적 기간을 매일 스스로에게 인지시키고, 공무원연금과 명예퇴직 수당을 미리 고려하는 이상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절대 퇴직하지 못할 것이다.
Q. 솔직하게 물어보자. 반드시 ‘명예’ 퇴직을 해야만 하는가?
A.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면 퇴직은 빠를수록 좋다.
Q. 그러면 왜 명예퇴직을 생각했는가?
A.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안정감, 사회로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두려움, 명예퇴직수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나약함 때문이다.
Q. 아니, 그보다 왜 퇴직을 하려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이 일이 싫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싫어서인가? 아니면 진정 좋아하는 일을 찾았기 때문인가?
A. 이 일이 싫다. 싫은 이유는 수백 가지도 댈 수 있다. 사람이 싫은 건 아니다. 그리고 아직 좋아하는 일은 찾질 못했다.
크게 생각해라. 너의 퇴직은 ‘D-3650’이 아니다. '명예퇴직'이 아니다.
공무원 연금이나 명예퇴직수당이 없어도 된다. 미리 겁먹고 너의 가치를 폄하하지 마라. 퇴직의 순간은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았을 때 오는 것이지 10년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을 때, 그때 퇴직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날 나는 일기장 제목을 ‘공무원 퇴직일기, D-3650’에서 ‘자유로(自由路,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길)’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