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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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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여 Jun 17. 2020

36개월 차 우리

세 살 엄마와 딸

따님이 태어나고 지구가 태양을 안고 세 번 돌아 이제 세 살이 되는 따님. 


우리 가족 지난 36개월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우리 셋, 매일 엄청난 감정의 파도를 타면서 웃는 날보다는 서로 힘들어 한 나날들이 더 많았지 싶다. 


세상에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거의 십 년인데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며 싸울 줄이야. 그래도 우리는 한배를 탄 부부, 미운 정 고운 정 쌓으며 산다. 

꾸깃꾸깃한 색종이 위에 쓴 상. 남편 하. 나의 사과의 말. 사과는 주로 내가 먼저.


감정이 좀 더 예민해진 것 같은 따님의 지난 몇 주는...


1. 알파벳과 한글 글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 

사실 글자를 깨우치는 거는 서두를 필요가 전. 혀. 없다고 생각하나 책을 좋아하는 따님이라 그런가 특정 단어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질문을 곧잘 하기에 흥미를 잃지 않게 재미있게 대답해 주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시각적으로 글자 생김새가 재미있는지 알파벳 하나하나 짚으면서 물어보는데 


'O' 오는 오-라고 말하는 입모양이랑 모습이 꼭 닮았지, 'C'는 꼭 하늘의 손톱 달 같네. 나중에 아빠에게 'C'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질문을 하길래 어찌 대답하나 보니 남편은 누군가가 'O'의 옆구리를 파먹었네 라고 하여 웃기도 하고. 


2. 우리가 좋아한 책 

Sylvester and the Magic Pebble, William Steig, 1970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 윌리엄 스타이그) 

조약돌 모으는 취미를 가진 당나귀 실베스터가 마법의 조약돌을 주으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문장 중 Clap of thunder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Pete's a pizza, William Steig, 1998 (아빠랑 함께 피자 놀이를, 윌리엄 스타이그) 

기분이 꿀꿀한 소년 피트를 위한 아빠의 놀이. 이 책을 읽고 따님이 꿀꿀해하면 나는 김밥 놀이를 해줄까나 생각했다지.


따님이 제일 좋아하는 페이지.

The Tale of Mrs. Tittlemouse, Beatrix Potter, 1910 (티틀 마우스 아줌마 이야기, 베아트릭스 포터) 


The Snowy Day, Ezra Jack Keats, 1962 (눈 오는 날, 에즈라 잭 키츠) 

A letter to Amy, Ezra Jack Keats, 1968 (피터의 편지, 에즈라 잭 키츠) 


눈 오는 날 - 눈 내린 어느 날 피터는 밖에서 눈을 가지고 신나게 논다. 눈에 발자국도 이렇게 저렇게 찍어보고 나뭇가지로 나무 위의 눈도 쳐보고 또 눈을 가지고 놀고 싶은 맘에 주머니에 눈을 담아 집으로 간다. 목욕을 하면서도 계속 눈 생각. 목욕을 마치니 고이 모셔온 주머니 안에 눈이 다 녹아버려 속상하다. 세상의 눈이 다 녹아버리는 슬픈 꿈을 꾸고 일어나니 밤새 새 눈이 내려 온통 하얀 세상. 피터는 친구를 불러 같이 눈 속으로 놀러 나간다. 


아이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나의 어린 시절 눈 내린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백인이 주인공인 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 시절 흑인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유색인종이 주인공으로 쓰인 책 중 처음으로 큰 상을 받았다. 다양함이 편견의 시선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며. 따님이 미래에는 이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3. 우리의 비슷한 하루 

아침 7시쯤 일어나면 옆에서 자는 나를 깨우다가 쪼르르 나가서 부부방에서 혼자 자는 아빠를 깨운다. 엄마는 그 사이 핸드폰을 급하게 찾아 나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페, 뉴스를 다 보려는데 출근 시절 마냥 아침 시간이 너무 짧아 다 못 보고 일어난다. 


아침이 늘 간단한 우리 집, 어제저녁에 먹고 남은 밥이 있으면 나는 아침으로 밥을 먹고 아빠가 포리지를 만들면 모두가 포리지를 먹고, 따님은 주로 Whitabix 시리얼을 달라고 한다. 한 달의 한번 주말엔 모두가 좋아하는 엄마표 뚱뚱이 팬케익. 


아침을 먹고 나서 같이 이를 닦고 비타민을 먹고 숲으로 물가로 슈퍼마켓으로 시댁 정원으로 가거나 몸이나 날씨가 무거운 날엔 집에서 놀기. 코로나 이전부터 늘 재택근무를 하는 아빠지만 요즘은 너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대는 바람에 안 나가면 고생이라 웬만하면 나간다.


코로나 이전에는 기차 타고 에딘버러도 자주 가고 여기저기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 밖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적이 많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없이 꼭 집에서 먹기에 돌아와 또 간단히 점심을 먹는다. 우리는 점심이나 저녁 중 한 끼는 꼭 조리를 많이 하지 않는 간단식 (대부분 샌드위치나 랩)과 샐러리, 당근, 오이 기본 세 가지 생 야채를 같이 먹는데 샐러드를 먼저 준비하여 식탁에 올려놓으면 따님이 먼저 앉아 야채를 집어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거나 아침에 안 한 일 (밖에 나가거나 집에서 놀기)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4시 반쯤 되면 한 시간 정도 티브이를 보게 해 준다. 요즘 따님은 위니 더 푸 (The Many Adventures of Winnie the Pooh, 1977)와 고래가 나오는 프리윌리 (Free Willy, 1993), 베이브 (Babe, 1995)를 즐겨본다. 그 시간에 나는 설거지와 저녁 준비를... 


저녁을 다 먹으면 디저트 담당 아빠가 내온 디저트를 맛나게 먹고 나는 또 설거지, 따님은 아빠랑 놀기. 설거지를 절대 즐기지 않지만 하루 종일 아이랑 시간을 보내고 나면 차라리 혼자 방해 안 받으며 설거지를 하고 싶다. 설거지가 끝나고 둘과 합류해 조금 같이 놀다 7시가 넘으면 목욕, 양치 담당 아빠와 올라가 하루를 마무리. 자기 전에 책 두권 정도 읽어주고 물고 빨고 안아주면 따님은 잠이 들어 중간에 깨는 날 거의 없이 11-12시간 정도 쭉 잔다. 


드디어 육퇴 하면 샤워하고 한 달째 꾸준히 잘 진행 중인 요가 30분 정도까지 마치면 저녁 9시. 9시부터 11시 반 정도까지 진정한 나의 자유시간. 더 깨있고 싶어도 체력이 안따르고 다음날이 힘들어져 자정 이전에는 자려고 하는데 그 3시간 좀 안 되는 자유시간이 너무너무 짧게 느껴진다. 


일 들어오면 일을 하고, 일 없으면 영화 틀어놓고 이것저것 만들기. 지난 몇 주간은 따님의 생일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였다.

코끼리를 좋아하는 따님의 취향에 맞춰 코끼리 가족 생일카드 제작.
생일상에 올릴 이름 장식도 제작.
열심히 코바늘로 뜬 아기코끼리. 서랍에 숨긴 것을 발견하여 미리 줘버린 생일 선물.


4. 엄마는 SNS 디톡스 중 

나의 평범한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핸드폰 보기, 하루 종일 틈만 나면 핸드폰 화면 속 세상 보기, 육퇴 후 나의 자유시간도 핸드폰 안의 세상을 보며 마무리하는 나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보내도 내 감정이나 우리의 하루에 영향을 안 받으면 괜찮을 텐데 다른 이의 예쁜 삶을 휙휙 넘겨보며 나를 찌질이 모드로 몰아가고 따님은 엄마 폰 그만보고 자길 봐달라고 한다. 


아 이 지겨운 쳇바퀴, 내게 삶에 집중해서 사는 게 왜 이렇게 어렵냐고 묻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나 자신을 잘 알지 않는가? 나는 동시에 여러 일을 못한다. 한 생각에 빠져 주변에 돌아가는 다른 일을 못 인지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집중력이 강한 걸까 집중력이 엄청 약한 걸까. 어쨌거나 나의 시간을 잡아먹는 주 요소인 인스타그램, 블로그, 카페 앱들을 폰에서 지워버렸다. 따님과의 하루에서 나에게 허락하는 화면은 같이 보는 티브이나 킨들 전자책. 따님 앞에서 핸드폰을 오래 잡지 말 것 굳이 무언가 보겠다면 글을 읽는 브런치나 뉴스만 가능. SNS는 육퇴 후 자유시간에 삼십 분 넘기지 않게 볼 것. 


그렇게 SNS 디톡싱을 시작하고 첫 사일은 책 두 권을 연달아 끝냈고 무리 없이 잘 진행 중이다. 뭐 중독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 습관을 고치자 시작한 건데 SNS 세계를 굳이 일분일초 업데이트를 안 해주어도 내가 아는 세상은 참 똑같다는 사실에 그냥 흥미를 잃은 것도 같다. 대신 글을 쓰고 싶은 맘은 점점 커져 브런치에서 뭔가 계속 읽고 싶기는 하다. 

한 번은 따님이 킨들 화면에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를 보고 이 레이디가 누구냐고 묻는다. 


나: She is a writer. I have some books by her but I haven't read them yet, They are a little difficult for me. (그녀는 작가야. 내게 그녀의 작품이 몇 권 있는데 조금 어려워서 아직 못 읽었어). 

따님: Will she send books to us? (그녀가 우리에게 책을 보내 줄까요?) 


정말 그녀가 직접 보내준 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또 맞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 일거야. 


5. 따님의 새로운 장난감 

스마트폰 시절 이전 어느 해, 한국에 휴가차 잠시 갔을 때 꽃 사진을 찍고 싶어 하던 엄마를 위해 하이마트에 가서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를 샀다. 몇 년이 흘러 스마트폰에 밀려 책상 서랍 구석에서 나오질 못하는 엄마의 똑딱이를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싶어 가지고 왔는데 따님에게 주니 너도 나도 좋아하는 엄청난 놀이를 제공하는 장난감으로 재 탄생하였다. 


모델인 뚜비와 뽀를 앞세워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보여주면서 얼마나 웃는지. 매일 사진을 찍겠다며 장난감 친구들을 여기저기 세우고 카메라를 잡은 손은 더 야물어지고 버튼을 누르고 사진이 흔들리지 않게 잠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도 척척 익힌다. 따님의 모든 사진이 다 사랑스럽고 좋다. 디지털카메라이지만 사진 느낌은 왠지 필름 카메라처럼 따뜻한 사진들.

뚜비야 여기 봐!

따님의 작품세계.

이걸 찍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는 따님.
엄마의 커피.
이것도 찍고 깔깔깔.
너의 공룡 사랑.


6. 내가 좋아한 책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 전지민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글과 사진에서 자연 속에서 부는 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나와 동갑, 딸아이 엄마, 도시를 벗어난 자연 속의 조화로운 삶. 모든 게 끌려서 찾아 읽게 된 그녀의 이야기.


마치 내가 그들과 함께 화천의 사계절을 만끽하듯 푹 빠져 책을 다 읽고 나니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쫑알대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따님이 보인다. 


내 뱃속에서 매일 딸꾹질하던 조그만 생명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삼 년 전 여름에 네가 세상에 나와 우리는 매일 서로를 알아가며 울고 웃고 삐그덕 대기도 하면서 벌써 네 번째 여름을 같이 보내고 있다. 


나이가 드는 것이 전혀 싫지 않지만 가끔은 어릴 적 우리 다섯 가족이 복닥대며 살았던 홍은동 현대아파트 우리 집, 그 시절 젊었던 할머니, 아빠, 엄마가 그립듯 제일 젊은 순간인 오늘의 우리 세 가족이 그립다. 그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더 열심히 기록을 해야겠다.

이렇게 조그맣고 빨갛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랑 오레오도 나눠 먹고
나는 너의 세계가 참으로 귀엽고도 재미있어.
야무지게 스프링클도 잘 올리고
네가 직접 손으로 집어낸 사과씨를 심은 화분에 데이지도 하나씩 꺾어서 올리더니
정원 어디에선가 똑 따와 엄마한테 선물이라며 준 예쁜 꽃 보다 더 예쁜 사랑하는 나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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