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전기온수기가 또 고장이 났다
샤워를 하려는데 물이 미지근하다. 어, 이상하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온수기가 또 고장 났나 보다. 집 지은 지 10년이 넘어가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사람을 놀래키는 것 같다. 대충 씻고 보일러실로 가 보았다. 역시 심야전기온수기 물 온도가 34도 밖에 안된다.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정확한 고장의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예전에 누전 차단기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수리업자를 불렀다가 비싼 출장비 내고 배 아파했으니,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면 안 된다.
하나씩 차분히 체크를 했다. 분명히 전원 스위치에 불이 켜 있으니 전기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 더구나 바로 옆에 설치된 난방용 보일러는 정상 작동하고 있으니까. 또 누전 차단기가 고장이 난 걸까? 그래서 누전 차단기와 옆에 붙어있는 마그네틱까지 떼어내 검사를 했다. 둘 다 정상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야전기가 들어오는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정확한 현상을 알아야 대책도 마련할 수 있는 법이다.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 확인을 했는데, 온수기 마그네틱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뭔가 작동은 하니 전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내 능력을 벗어난 게 분명하다. 아직 금요일 밤이니 A/S 신청을 하면 혹시 토요일 오전에라도 수리업자가 나와주지는 않을까? (바랄 걸 바래야지,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24시간 A/S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전화연결도 안 되고,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고장 접수를 했다.
'심야전기온수기 고장: 심야전기는 들어오고, 누전 차단기와 마그네틱도 정상임. 그런데 마그네틱이 딱 딱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함.'
토요일 아침엔 물이 25도까지 내려갔다. 또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궁핍한 생활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꼭 연례행사를 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고장은 하필이면 꼭 추운 금요일 저녁에만 발생하여 주말 내내 고생하게 만든다. 추운 금요일 밤이 무섭다. 혹시나 싶어 A/S 센터에도 들어가 봤지만, 화면에는 어젯밤 고장접수 이후 변경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하긴 주말이니까!
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일요일에는 난방용 보일러도 이상해졌다. 집안이 약간 추워진 것 같아서 보았더니 보일러 물 온도가 45도밖에 되지 않았다. (온수기는 14도다.) 보일러 히터가 가동되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밤새껏 물이 몇 도 밖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 난 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기상예보는 폭설이 내릴 예정이니 각별히 주의를 하라는 문자까지 보내왔다.
이제는 비용이 문제가 아니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빨리 수리기사를 불러야 한다. 나중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온수야 안 씻고 버틴다지만, 물이 식어 집이 추워지는 건 대책도 없다. 하지만 연락할 곳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식구들 몰골이 모두 초췌해 보였다.
월요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보니 눈이 계속 오고 있었다. 혹시 눈 많이 온다고 오늘 수리기사가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분명히 근무시간이 되었는데도 A/S 센터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언제 수리하러 온다는 연락도 없었다. 카톡으로 겨우 상담 센터에 연결됐다. 그런데 방문 일정이 화요일로 잡혀있다고 한다. "금요일 밤에 접수를 했는데 화요일에 온다고요? 이 추운 날씨예요?" "예, 접수 순서대로 고객님을 방문하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사정을 해봤자 소용도 없는 일이다. 상담원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는 기계적인 말 뿐이니까.
지역 보일러 대리점을 찾아서 직접 연락을 했다. "난 잘 모르겠고, 고장 접수했으면 수리기사가 알아서 나갈 거예요!" 끊으려는 전화를 붙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애처로운 목소리로 통사정을 했다. "며칠째 씻지도 못하고 추워서 덜덜 떨고 있거든요!"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동정심이 먹혔는지 어렵게 어렵게 보일러 수리 기사님과 전화 연결이 됐다.
한참 동안이나 내 설명을 들은 기사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이건 분명히 한전 문제인데요."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내 말귀를 못 알아들으셨나? 귀찮으니 한전에 떠 넘기려고? 내 목소리 톤이 조금은 높아졌던 것 같다. "아뇨, 분명히 전기는 들어와요. 어젯밤에 보일러 물 온도가 몇 도 올라갔어요!" 그러자 그 기사님은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일단 보일러와 온수기가 동시에 고장이 날 확률은 거의 없어요. 하루나 이틀 차이는 뒤늦게 발견한 거고요. 그리고 삼상 전기 (380V)에서 어느 한 선이 끊어지면 전압이 불안정해져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해요. 그러니 한전에 연락해 보세요!" 어? 전압이 불안정해져도 그럴 수 있다고?
곧바로 한전에 전화를 했다. 내가 들은 대로 상황 설명을 했더니 눈길을 헤치며 수리기사가 달려왔다. 물론 이때도 금요일 밤부터 며칠째 씻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다고 죽는소리는 했다. 전기 수리기사는 곧바로 "전기 문제네요!" 한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전기 문제라고 하는지, 어떻게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간단해요. 여기 계기판에 V1, V2, V3라고 글자가 보이세요? 이 중에 깜박거리는 게 있으면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에요." (V3가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V1,2,3가 삼상을 의미하고 그중에 하나가 끊어졌다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는 전봇대에 올라가서 끊어진 퓨즈 하나를 교체해 주고 시험을 하니 보일러와 온수기가 정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목돈도 안 들어가고 간단히 수리가 끝났으니 좋기는 한데, 금요일 저녁부터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도대체 저런 것을 어떻게 다 아나? 매번 당하고 나서야 하나씩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번 고장 때는 누전 차단기나 마그네틱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치지만, 전압이 불안정해져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앞으로도 무슨 고장이 또 발생할지도 모르니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정말 어렵다!
시골의 전원주택에서 한 겨울을 보내려면,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누가 한꺼번에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몸으로 때우며 하나씩 배워가야 한다. 더구나 집 지은 지 10여 년이 지나면 여기저기에서 슬슬 물이 새기도 하고, 지하수가 고장이 나고, 보일러가 고장 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건 단연코 보일러 고장이다.
밤늦게 데워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서 행복해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그 평범하고 당연한 일 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행복해질 수가 있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식구들도 모두 행복해했다.
다음날 아침, 나에게 '전기 문제'라고 가르쳐 준 보일러 수리 기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어제 말씀하신 대로 한전에 연락해서 전기 수리하고는 보일러가 잘 작동됩니다. 덕분에 지금은 따뜻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조언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썼다. 이 마음은 진심이었다.
잠시 후에 그 기사님으로부터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행복했지만, 아마도 그 기사님도 뿌듯한 생각이 들으셨을 것 같다.
어느새 지난 며칠간 고생한 기억은 다 사라지고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작은 나눔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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