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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골살이

고장은 꼭 추운 날 밤에만 발생한다

한겨울의 시골은 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다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언제 강추위가 닥칠지 모르므로 막바지 겨울준비를 해야 한다. '설마 이 정도야 괜찮겠지'라며 시골의 겨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는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아무리 온난화로 따뜻한 겨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얼 것은 얼고 터질 것은 터진다. 지난 10여 년간 수업료 톡톡히 내고 배운 교훈이다. 시골의 겨울은 춥다. 그것도 아주 많이 춥다.


미리 챙겨야 하는 일들을 열거하자면, 먼저 과수원에 사용하던 동력분무기나 펌프의 물을 빼 주어야 한다. 행여 물이 남아있으면 영하의 온도에 얼어 터진다. 튼튼한 쇠붙이로 만들어져 있는데도 금이 가고 터진다. 예전에 멋모르고 물도 빼지 않고 펌프를 내버려 두었다가 일 년 만에 펌프를 교체해야 했다.


집 외부에 있는 수도도 얼지 않도록 싸매어 주어야 한다. 동파방지용 밸브가 있는 수도(지하수 용)는 뒤 밸브는 잠그고 앞 수도꼭지는 열어놓으면 된다. 깜빡 잊었다고 변명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나중에 땅 파고 수도관 교체하려면 허리가 휜다. 힘들다고 업자 부르면 허리 대신 가계가 휜다. 언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데, 난 어처구니없게도 그 짓을 두 번이나 했다.


추위에 약한 나무들 (특히 유목)은 동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료포대로 싸 주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수성페인트라도 칠해주어야 한다. 그까짓 페인트 발라줘서 효과가 있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효과가 있긴 있다. 그러나 경험상 공기가 통하는 사료포대로 싸주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사료포대는 구하기도 쉽고, 일하기도 편하고, 효능도 좋다!


볏짚으로 싸주면 더 좋겠지만 요즘은 거의 사료용으로 팔아버리므로 시골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늦가을 시골 벌판에 뒹굴고 있는 하얀 공룡알 같은 것이 전부 사료용 볏짚 뭉치다. 앞마당에 화분도 있다면 집안에 들여놓아야 하고, 늦가을에 심은 마늘, 양파가 얼어 죽지 않도록 비닐로 덮어주어야 한다. 창문에는 단열용 뽁뽁이도 붙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따금 문제가 생긴다. 바로 지난겨울, 하필이면 몹시도 추웠던 날 한 밤중에 벌어졌던 일은 쉽게 잊힐 것 같지가 않다.


터진수도 브런치1.jpg 슁글을 덮은 지하수 설치함. 얼어 터진 수도관을 교체하며 설치함도 말끔히 보수를 했다.


정확히 밤 10시 30분. 취침 전 양치질을 하려는데 갑자기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기는 들어오니 틀림없이 지하수 펌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낮에 한파주의보 경고 문자까지 떴는데... 혹시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모터가 얼어버린 것은 아닐까? 귀찮다고 아침까지 내버려 두었다가는 피해가 더 커질지도 모른다. 휴대폰에 뜨는 외부 온도는 영하 11도지만 깜깜한 창밖 바람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두꺼운 잠바에 털모자까지 쓰고 지하수 설치함이 있는 과수원으로 나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아내도 손전등을 들고 따라나섰다. 펌프가 얼어 터진 것만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대부분 펌프의 압력스위치만 교체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제발 압력스위치 고장이기를 바라면서...


어? 그런데 지하수 설치함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며칠 째 지속된 강추위에 뚜껑이 몸체와 얼어붙은 것 같다. 뚜껑이 열려야 무슨 조치를 취하기라도 하지.


예전에 집 짓고 남은 게 나무뿐인지라 지하수 설치함도 뚜껑도 전부 나무로 만들었는데 그 뚜껑에 슁글을 씌운 게 문제였다. 슁글은 생각 외로 엄청 무거워 평소에도 슁글로 덮여있는 지하수 설치함을 열려면 끙끙거려야 했다. 그리고 이제 강추위로 그 무거운 뚜껑이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않으니 완전히 망해버린 꼴이었다. "진작 뚜껑 좀 바꾸라니까..." 아내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나도 이럴 줄 알았더라면 벌써 바꿨다.


'빠루'(노루발처럼 생긴 굵고 큰 못을 뽑을 때에 쓰는 연장)를 가져와 얼어붙은 뚜껑과 벽체 틈새에 망치로 두들겨 넣었다. 그리고는 지렛대처럼 문짝을 들어 올리려 해도 나무가 쪼개질지언정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운 한밤중인데도 열이 나서 씩씩거렸다. 이런 상황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공연히 날벼락 맞을까 봐, 와이프는 잔뜩 웅크린 채 말없이 전등불만 비추고 있었다. 힘쓰다 지쳐서 이번에는 '가스 토치'를 가져와 틈새를 녹였다. 녹인 건지 태운 건지 헷갈릴 때까지 녹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씨름한 후에, 뚜껑은 거의 다 망가지고 나서야 겨우 열렸다.


다행히 모터가 얼었던 것은 아니고, 간단하게 압력 스위치 교체로 펌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휴우~ 정말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쉬며 대충 지하수 설치함을 덮어주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밤 11시 20분이다. 영하 11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동안은 추운 줄도 몰랐다.


"그래도 나 같은 남편이 있으니까 이런 것도 고치는 거야. 이런 것 못 고치는 남자도 많다고!" 의기양양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응. 그런데 난 혼자 살게 되면 곧바로 아파트로 이사 갈 거야". 그리고는 아내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기껏 고생은 내가 했는데...


아침 일찍 수리업자를 부른다고 해도 업자가 곧바로 우리 집을 방문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런 날씨라면 다른 집 수도도 얼어 터진 곳이 많을 테니까. 물이 안 나온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겠지만, 받아놓은 물이 없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건 확실하다. 그리고 며칠간은 꾀죄죄한 몰골로 궁상을 떨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자그마한 단독주택에서 살면서 미리 물통에 물 받아놓고 쓰는 집은 거의 없다.


물론 아내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추운 겨울날 시골의 단독주택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게 겁이 날만도 하다. 한겨울의 시골은 남자 혼자 살기에도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고장은 꼭 추운 날 밤에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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