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냉동고를 뒤져서는 안 된다

혼자 밥 차려먹으려 냉장고 뒤지는 것은 된다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주방에 있던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투 도어 타입으로, 아래쪽은 김치냉장고로 위쪽은 냉동고로 사용해왔다. A/S 기사는 아깝게도 무상 보증기간이 막 지났고, 컴프레서가 고장 나서 수리 비용도 많이 나온다고 한다. 또 수리를 하더라도 오래 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 웬만하면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조언도 해 주었다. 그리고는 짐짓 미안한 듯 출장비도 만원만 받고는 가버렸다.


문제는 냉동고 사용에 있었다. 김치냉장고라면 당연히 냉장고용으로만 써야 한다. 설사 냉동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사용해야 한다는데, 우리 집은 구입 초기부터 윗 칸을 아예 냉동고로 사용해왔다. 그것도 물건을 꽉꽉 채워 넣고서 10년 넘게 팡팡 돌려댔으니 결국 컴프레서가 맛이 가버린 거다. 아내는 냉동고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는데 (시골 살림살이라 더 그렇다고 한다), 정말 냉동고 공간이 부족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fridge-3475996_1920.jpg 정리가 잘 된 냉장고의 모습이다. 나는 우리 집 냉장고 속 사진을 찍어 올릴 만큼 간이 크지 못하다. (사진출처 Pixabay)


냉동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남편분들 하루 종일 집에 계시더라도 꼭 지켜야 할 불문율이 있으니 절대로 냉동고를 뒤져서는 안 된다. 만약 냉동고를 뒤졌다면 아닌척하고 있어야 한다. 혼자 밥 차려먹으려 냉장고를 뒤지는 것은 괜찮다. 냉장고는 되는데 냉동고는 안된다는 이 기묘한 논리를 내 머리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따금 사다 놓은 식재료가 없어서 반찬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말을 아내에게서 듣는다. 그런데 냉동고를 열어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차있다. 몇 달 동안 장에 가지 않더라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너무 많은 식재료가 쌓여있어 안쪽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예전에 냉동고 안에 들어있던 아이스크림을 몰래 꺼내다가 수북이 쌓여있던 물건들이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놀란 적도 있다.


아내 역시 냉동고 깊숙한 곳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모르는 게 틀림없다. 요즘 같은 기억력에 예전에 넣어둔 물건을 다 기억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 집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아내가 외출 중일 때 냉동고를 정리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냉동고 깊숙한 안쪽에서 몇 년은 된 것 같은 말라버린 생선도 나왔고, 떡 조각도, 고기도 발견했다. 그날 무심결에 한 마디 잔소리를 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별로 싸울 일도 아니었고, 또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내는 매우 강하게 반응을 해왔다.


나중에 가까이 지내는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기껏 냉동고 청소를 해 주었는데 나중에 아내가 화를 내서 대판 싸움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도 버리는 식재료들이 아까워서 나처럼 잔소리를 했다고는 한다. 하지만 잔소리 때문에 아내들이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평소에 아내는 내 잔소리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냉동고는 남자들이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되는 성역인가 보다.


가까이 이웃집도 사정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며칠 전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내에게 푸념을 하시더란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남편 눈치 보느라 음식물도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쩌다 아저씨가 집을 비울 때 재빨리 음식물 쓰레기를 치워버린다고 하신다.


또 "음식물 쓰레기 버려줄까?"라고 아저씨가 물어오시면 음식물통이 아직 비어있다고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한다고 하신다. 공연히 쓰레기 버리다가 음식물을 보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잔소리를 할 테고, 그러면 싸움밖에 더 하겠냐는 말씀이시다. 요즘 젊은 세대야 남편이 요리도 하고 주방 살림도 함께하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정말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내 잔소리 한마디로 냉랭한 분위기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 반찬은 김치 딱 한 가지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냉동고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 주제넘게 냉동고 정리해 준다고 나서지도 않는다. 또 어쩌다 부득이 냉동고를 열게 되더라도 못 본척하고 지낸다. 보복이 두려워, 그저 입 꾹 다물고 묵묵히 산다.


나이 들어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나는 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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