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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침이와 호돌이네 Jul 01. 2021

어디 가서 고추 얘기는 꺼내지도마!

농사란 자연과의 투쟁인가 보다

해마다 우리 집은 텃밭에 고추를 1판 (36포기) 정도만 심는다. 포기당 마른 고추를 반 근 이상 수확하니 이 정도면 김장을 하고, 고추장도 담그고,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1판만 심는다고 하면 기막혀한다. "겨우 고만큼 심어 누구 코에 붙이려고?" 그분들 말마따나 내 주위의 어느 집을 보더라도 고추를 그렇게 적게 심는 집은 없다. 아무리 자급용이라고 하더라도 3판 (108포기) 이상이 기본이다.


하지만 많이 심는다고 꼭 수확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막상 그분들의 밭에 가보면 고추들이 너무 가까이 심겨 있다. 간격이 너무 가까워 고추 이랑 사이로 지나가기도 어렵다. 반면에 우리 집은 간격이 널찍널찍하다. 같은 수량을 심더라도 빽빽하게 심는 것과 널찍하게 심는 것과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공간이 넓으면 고추는 더 크게 자라고 더 많이 열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단점도 있으니 한 포기라도 죽으면 빈 공간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모종을 심고 100% 산다는 법이 없으니, 이따금 텃밭은 듬성듬성 이 빠진 모습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빈자리만 생기면 곧바로 새로 모종을 사다가 심곤 했다. 안달 맞게 심었으니 몇 포기만 죽어도 수확량에 차질이 생겼고, 또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지금에야 몇 포기쯤은 죽더라도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잘 자라고 있었다. 죽은 고추도 한 포기도 없었고.


텃밭 농사 중에 제일 힘든 게 고추농사다. 그나마 고추농사가 돈이 된다지만 그만큼 힘도 들고 할 일도 많다. 고추는 병 피해가 많아 방제를 철저히 해야 하고 (장마철에는 3~4일에 한 번씩 방제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잘 붙들어 매어 주어야 한다. 


또 수확기가 하필이면 제일 무더운 한 여름이니 숨이 콱콱 막히는 햇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수확해야 한다. 또 고추를 말리는 것은 어떻고? 건조기로 말린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태양초를 만들려면 끊임없는 노동이 필요하다. 아마도 텃밭 작물 중에 고추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물도 없는 것 같다. 


어째 올해는 빈 곳이 너무 많아 보인다. 더 이상 병이 퍼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올봄에 주위에 좋은 고추 품종으로 모종을 만든다는 분이 계셔서 특별히 부탁하여 한 판을 구입했다. 올해는 고추 품종도 좋고, 밭에는 굼벵이 분변토도 듬뿍 뿌려주었고, 검은 비닐 대신에 물과 바람이 통하는 부직포로 밭을 덮어 주었다.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고춧대가 내 키만큼 자라고, 빨갛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겠지. 이번에는 고추 한 포기에서 마른 고추 한 근을 만들어봐야겠다.


고추 모종은 얼마 전까지도 무럭무럭 잘 자라는 듯싶었다. 그런데 텃밭 끝쪽에 심은 고추 몇 포기가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어? 고추가 이상한데?" 새벽에는 멀쩡해 보이다가도 햇빛만 나면 축 늘어져버렸다. 혹시나 싶어 검사를 해보니 고추 풋마름병 (청고병)이다. (투명 컵에 물을 받아놓고 고추 줄기를 잘라 담갔을 때 흰 액체가 흘러나오면 풋마름병이다). 풋마름병은 치료약도 없으므로 더 이상 병이 퍼지지 않도록 빨리 뽑아버리는 게 상책이다. 올해도 갑자기 텃밭에 이 빠진 공간이 생겼다.


며칠 전 밤에는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천둥 번개를 치며 무섭게 비바람이 불었다.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 다행히 텃밭과 과수원에 이렇다 할 피해는 없어 보였다. 다만 고추 한 포기가 부러졌고, 풋마름병이 퍼졌는지 몇몇 옆에 있던 고추들이 시들어 있었다. 고추 몇 포기를 더 뽑아버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고추 밭의 25%가 망가졌다). 고추농사 신기록은 이미 물 건너갔고 김장이나 제대로 담글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얗게 내린 우박으로 고추밭이 다 망가졌다. (출처: 농민신문)


비바람이 친 다음날, 우박피해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우리 집은 비바람만 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충주 곳곳 농작물 쑥대밭. 지름 2cm 우박이 총알처럼 꽂혀!'란 제목의 기사였다. '말도 못 해요. 주먹 같은 게 막 쏟아졌어. 고추밭, 참깨밭, 옥수수밭. 여기 보세요. 다 작살났지!' 피해를 입은 농민의 말이다.


혹시나 싶어 사과 과수원을 하시는 형님께 안부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형님댁은 우박으로 올해 농사가 다 망가졌다고 하신다. 사과도 우박을 맞아 다 파였고 고추도 텃밭 채소도 다 찢어졌다고 하신다. 6월 말에 우박이라니! 나도 기가 막혀할 말이 없었다.


요즘은 한 해도 제대로 넘어가는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짓는 게 농사라고 했는데, 요즘의 농사는 자연과의 투쟁인 것 같다. 인간이 기껏 환경을 파괴해 놓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그 파괴된 환경에 의해 역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농부들은 맨 앞에 서서 자연에 의해 처절하게 두들겨 맞으며 살아가고 있다. 원하지도 않았고 결코 이기지도 못할 자연과의 싸움에서.


한숨짓던 형님이 말씀하셨다. "다 망가졌어도 그래도 밭에 가서 일을 해야지. 내년에도 농사 지으려면 그냥 놔둘 수도 없어!" 옆에서 얘기를 전해 들은 아내가 조용히 말을 했다. "어디 가서 우리 집 고추 얘기는 꺼내지도마. 그런 것은 피해도 아니니까!"


기습적인 우박이야 금세 녹아 땅속으로 사라졌다지만, 망가진 과수며 농작물은 올해 한 해 내내 농부들의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늦가을까지 상처 입은 과수를 보며 지내려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작년에 긴 장마로 사과농사 망쳐놓고, 겨울이 되기까지 날마다 망가진 사과나무를 쳐다보던 내 마음이 그랬었다. 농사는 해마다 속으며 짓는 거라지만, 내년에는 정말로 좋아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더 이상 고추가 죽지나 말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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