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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침이와 호돌이네 Jan 26. 2022

직업이 뭐예요?

귀촌일기

시골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내 직업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당시는 한창 일을 해야 할 젊은 나이였으니 뭔가 대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딱히 그럴듯해 보이는 직업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제일 만만한 직업이 농부인데, “농사를 짓고 있어요.”라고 대답을 하면 질문이 잇따른다. “무슨 농사를 짓는데요? 농사 규모가 얼마나 돼요?” 그러면 주춤할 수밖에 없는데, 자칫 어렵다는 사과농사 얘기를 꺼냈다가는 초보라는 게 바로 탄로 날 테고,  농사 규모 역시 우리 집 과수원 크기로는 생업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뜻 농부라고 대답을 하기도 어려웠다.

    

헤르만 헤세가 그린 수채화 <전원 풍경>

그다음으로 말할 수 있는 직업은 목수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 대부분을 직접 지었으니 목수라고 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지금까지 집을 딱 한 채 지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과연 이런 것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은근히 자랑을 한다. “제가 이 집을 직접 지었거든요!” 그러면 대개는 내가 집 설계를 했거나 직영공사 (건물의 주인이 인부 및 물자를 직접 조달하여 지은 집)로 지은 집인 줄 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창고에 늘어놓은 내 공구들을 보여준다. 그제야 사람들은 “와, 집을 짓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라며 나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혹시 우리 집 데크를 만들어주실 수 있나요?” “화장실 타일도 교체할 줄 알아요?” “차고를 좀 만들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몇몇 소소한 일을 해드렸더니만 나중에는 리모델링 공사 제안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 집 여기저기에도 하자를 남겨놓은 반풍수 목수로서 남의 집까지 손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농사 일로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라고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하곤 했는데, 이럴 때 보면 내 직업은 농부가 된다.

        

존 에버렛 밀레이 <목공소의 예수 그리스도>

결국 제일 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백수였다. 백수라고 말하면 쉽게 넘어가긴 하는데 뒷말은 좀 들려오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어디가 아파서 시골로 왔거나, 아니면 돈 많이 벌어놓고 시골로 놀러 온 줄 안다. 나를 두고 뒤에서 뭐라도 말하든 상관은 없는데, 문제는 백수는 항상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 줄 안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수시로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다. "혹시 이번 주에 바빠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백수 주제에 일주일 내내 바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니요”라고 대답을 하면 이상하게 엮여 일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 처음에는 하도 많이 불려 다녀서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실감 나기도 했다. 물론 뻔뻔해진 지금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빠져나간다. (가만히 따져보면 실제로 바쁘기도 하다.) 요즘은 한 가지 핑곗거리가 더 늘었으니, 농사지으랴 목공 작업하랴 남는 시간 쪼개어 글도 쓰랴, 세상에 나처럼 바쁜 사람도 없어 보인다.


우리 집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

근래에 들어 내 주위에는 은퇴를 한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나름대로 아직 일을 더 할 수 있는데 이제는 나이가 찼다고 집에서 쉬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은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혼란스러워한다. 은퇴 후에는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지도 못한다. 평생 동안 직장이나 오가며 살았지 뭐 특별히 해본 것도 없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다. 은퇴 후 남겨진 인생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기대수명도 늘어나서 앞으로 20년은 더 산다고 봐야 한다. 그 시간이 길어도 보이지만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문득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남겨진 소중한 시간들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제2의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또 조금 용기를 내면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중요한 것은 내 삶의 방식이며 내 삶의 질이다.  


헤르만 헤세. 그는 본업이 작가인 농부이고, 나는 본업이 농부인 작가다.

비록 반풍수이긴 해도 내가 하는 일로 따지자면 나는 농부요 목수다. 다시 말해 나는 사람들의 먹거리를 키우고 생명을 지키는 농업인이며, 나무로 필요한 물건을 창조해내는 목수다. 나는 듣기에는 참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살다 보면 농부와 목수란 내 직업에 사람들은 별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그냥 백수라고 대답을 해도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온 사람'이라고 알아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내 직업을 묻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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