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일기 중에서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는 일 년 중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겨울이었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빌딩사이로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과 음산한 바람소리까지 딱히 겨울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행여 사무실 창밖으로 눈 내리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탄성은커녕 퇴근길에 차가 막힐 것이 더 걱정이 되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그 당시의 나는 '낭만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찾을 수 없는 분(또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내가 변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지금은 '겨울이 일 년 중에 제일 좋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정말로 겨울을 제일 좋아한다. 왜냐하면 겨울철에는 풀 깎을 일도 없고, 농사일도 하지 않고 계속 놀아도 되는 계절이니까! 더구나 뱃살이 두둑해진 이후로는 추위도 잘 타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내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겨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한창 농사철이면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든데, 요즘은 뭐 하고 지내냐며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온다. 심심하니까 식사나 같이 하자고. 코로나만 아니었더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갇혀 지내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겨울이 되면 내 주위 분들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 (이하 1번이라 칭함)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밭농사나 과수농사 하시는 분들이다. 밭농사는 봄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으니 2월까지는 맘 편히 놀아도 된다. 작물에 따라 때로는 3월까지 놀아도 된다. 과수농사는 조금 빨리 2월 중순부터 전지작업을 시작하지만 대개 3월 초순이면 끝난다. 그리고 본격적인 한 해 농사는 4월이 되어야 다시 시작한다.
2번은 가축을 키우시는 분들이다. 이 분들은 일정이 그렇게 바빠 보이지는 않는데 하루도 집을 비울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아침저녁 하루 두 끼를 꼭 챙겨 주어야 하는 상전을 모시고 산다. 나야 일을 하고 밥을 얻어먹는다지만, 이놈들은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서 꼬박꼬박 밥만 얻어먹는다. 행여 병이 날까 봐 주인이 노심초사하고, 심지어는 살이 빨리 오르지 않는다고 걱정까지 해준다.
3번은 시설재배 하시는 분들이다. 이 분들은 겨울철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목이므로 같이 놀아본 적이 없다.
내 주위에는 형님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는 세 부부가 있다. 모두 1번과 2번에 해당하는 분들이다. 자그마해도 과수원이 있는 우리 집도 1번에 끼워준다. 일 년 중 요즘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마음대로 놀러 가지도 못하고 지내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곤 했다. 몇 년 전에도 그랬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여행이나 가기로 하죠!” “좋아요!” 다들 아우성이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가까운 동해안이나 서해안은 이미 수도 없이 가봐서 별로 관심도 없단다. 하기야 시골 살면서 봄가을 관광을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으니, 그동안 안 가본 곳이 없으신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남해안뿐인데, 그곳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가 만만치가 않다.
“남해안으로 가요!” “하루 자고 오면 되죠.” 다들 신이 나서 아우성인데 2번 형님이 슬슬 꼬리를 내리셨다. “글쎄 소를 굶길 수도 없고...” 다들 그 형님을 째려봤다. “아니 평생 소나 키우다 죽을 거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그 형님이 절충안을 내놨다. “글쎄 당일치기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말이야. 아침 일찍 사료를 주고 떠나면, 저녁 한 끼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당일치기로 여행을 갔다 오기로 결정을 했다. 안 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다음 남해안 어디로 갈 것인지 상의를 했는데, 당일치기 관광버스로는 결코 갈 수 없는 장소를 골라야 했다. 그렇게 낙점된 곳이 바로 남해군의 '독일인 마을'과 '다랭이 마을'이었다.
독일인 마을은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되었던 광부와 간호원들이 돌아와서 정착한 마을이다. 애초 이 마을의 설립 목적은 관광지가 아닌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국풍의 집들이 모여 있다. 독일인 생활방식에 검소함이 배어있다고 하더니만 대부분의 집들이 작고 아담하다. 깔끔한 거리와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어여쁘다.
그다음 행선지는 다랭이(규모가 작은 밭떼기를 지칭하는 단위) 마을. 지금이야 관광사업이라도 한다지만, 예전에는 먹고살기가 참 힘들었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급한 경사지를 깎아 돌을 쌓고 작은 밭떼기를 만들었을까! 그런데 경치는 정말 장관이다.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파란빛의 잔잔한 바다가 너무도 멋있었다.
세 부부가 모여 지난 여행을 회상하며 아쉬워한다. “남해에 놀러 갔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그때는 시간이 없어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언제나 다시 가 볼 수 있으려나?” 나이는 자꾸 먹어 가는데 이렇게 갇혀 살고 있으려니 다들 죽을 맛이다. “그때 먹었던 멸치쌈밥도 참 맛이 있었는데!” “여행은 역시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겨울에 가야 손님대접을 받는다니까요!” 다 맞는 말씀이시다. 겨울에는 집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면서! 아내는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이제 농사철도 서서히 다가오는데, 올 겨울에 어디 가기는 다 틀렸나 보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평생 해 온 일이 농사뿐이니, 아마도 1번 2번 형님들은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여행을 다닐 수 없을 때까지도 직업을 바꾸지는 못하실 게 분명하다. 나 역시 쉽사리 1번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작년에는 과수 농사도 별로였고, 또 요즘 소 값도 너무 떨어져서인지 다들 풀이 죽어 계시다. 올해는 특히 경제가 어려울 거라고 하던데, 가뜩이나 먹고살기 어려운 시골은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예측하기도 힘들다. "설마 굶기야 하겠어?" 애써 위안을 해 보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어느 누구도 선 듯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만 아쉬워한다.
아직 찬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벌써 1월도 절반이 지나가 버렸으니 머지않아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아무리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절기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제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한 해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 작년에는 힘든 한 해였지만 올해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려 한다.
지나고 보면 아쉬운 게 인생이라더니, 왠지 마음 한 구석에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올 겨울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