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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처럼 편한 직업은 없다

그렇다면 농부인 나는 과연 행복한가?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도시에서 먹고살기 힘들 때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치고 실제로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시골로 가자고 아내를 설득할 때에도, 오히려 반대를 했던 것은 아내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얘, 너 시골 따라갔다가는 큰일 난다. 절대로 안 간다고 버텨!" 그 친구의 조언에 반신반의했던 아내는, 친구가 해준 말을 나에게 일러바쳤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아내와 나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시골에 대한 동경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고 농사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농사를 짓는 분들은, 농사가 결코 쉬운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말하는 농사는 생업으로 짓는 농사를 의미한다). 농사를 쪼금 짓고 있는 나도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세상에 농사처럼 힘든 직업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나는 '농사처럼 편한 직업은 없다'라는 참신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한 평생 농사를 지어온 분한테서. 농사가 왜 편한 직업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물어봤다.


photographed by Foxbond.jpg 밭이 크면 트랙터에 앉아 편하게 밭을 갈고, 중간 크기면 관리기로 갈고, 손바닥만 한 땅이면 삽과 괭이를 들고 밭을 갈아야 한다. 농사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하다.


일단 농사를 지으면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직장 다닐 때에는 일보다는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하는데, 농사를 지으면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거의 없다. 또 농사란 게 죽어라 공부를 해야 할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요즘 날씨가 워낙 예측불허라 농사를 망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나를 탓할 사람도 없다. 내 농사 내 맘대로 짓는다는데, 감히 누가 뭐라고 할까?


출퇴근 시간도 필요 없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날마다 긴 시간을 출퇴근에 소비해야 하지만, 시골에서는 바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 일터다. 물론 교통체증 이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몸이 많이 피곤하거나 급한 일이 있으면 그냥 쉬고 다음에 하면 된다. 내가 바로 사장이니 누구한테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 더구나 농사일은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다.

날씨가 더울 때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게 단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꼭 단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원한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고, 더운 낮에는 낮잠을 자며 쉰다. 더구나 나이 들면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니 어차피 일어난 김에 일을 하면 된다. 또 일하다 가끔은 막걸리 한 잔씩 걸치고 해도 된다. 다 내 맘이다.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비를 맞으며 일을 하나? 눈 오는 날도 당연히 쉰다. 더구나 겨울이 되면 아주 긴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다. 가을걷이 끝나고 봄 농사 시작 전까지, 일 년에 몇 달씩 쉴 수 있는 직업은 농사 빼고는 없다.


'고흐'의 '젊은 농부'. 농부인 나는 과연 행복한가?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고? 천만의 말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요즘은 사람이 아니고 장비가 일한다. 트랙터도 있고, 굴착기도 있고, 관리기, 농약살포기, 비료살포기도 있다.


과수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승용 제초기도 있고 심지어는 농사용 사다리차도 있다. 그래서 시골의 웬만한 집에는 승용차 말고도 장비가 몇 대씩은 다 있다.

다만 농사 규모가 작아 손바닥만 한 땅이라면, 삽과 괭이 들고 옛날처럼 온몸으로 일해야 한다. 우리 집처럼...


정년퇴직? 움직일 힘만 있으면 언제까지고 할 수 있는 게 농사다. 내가 원하면 죽기 전까지 해도 되는 평생직장이다. 나이 들었다고 주위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전혀 없다. 주위를 돌아봤자 다들 늙은 사람들뿐이니까.


이렇게 좋은 게 많은데, 단점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농사 지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 빼면 정말로 농사만큼 좋은 직업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졌으니 사람들이 좋은 줄 알면서도 시골로 내려오지 못하나 보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시골은 도시만큼 돈 쓸 곳도 많지가 않다.


혹시 정부에서 기초생활비를 보태줄 테니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라고 하면 안 될까? 기본적으로 먹고 살 돈은 줄 테니 복잡한 도시에서 빈둥대지 말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으라고. 특히 은퇴했지만 아직도 생생한 베이비 붐 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인구도 분산되고 좋을 텐데...


듣고 보니 '농사처럼 편한 직업은 없다'라는 논리에 반박을 하려 해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긴 세상에 어떤 직업인들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은 천상의 직업을 갖고 있는 나는 행복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농부인 나는 지금 과연 행복한가?


오늘 예초기를 메고 하루 종일 풀을 깎았더니 어깨가 뻐근하고 손도 덜덜 떨린다. 하지만 예쁘게 깎인,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과수원의 풀 냄새가 상큼하다. 또 육체노동 후에 오는 약간의 노곤함도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뿌듯함도 있다. 과연 이런 느낌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잘은 몰라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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