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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말뚝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개발이 무섭다. 이제 이사를 가야 하나?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과수원에서 일을 하다가 빨간 말뚝이 몇 개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말뚝이 박힌 자리가 아스팔트 끝에서 약 3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즉 그 구간은 노견으로, 빨간 말뚝은 도로와 우리 집 땅을 구분하는 표시란 얘기다. 문득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우리 집 입구 쪽에 있는 아스팔트 2차선 도로는 예전에 사용하던 국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직선으로 4차선 국도가 새로 생기면서 이 도로는 폐쇄되었다. 그리고 이 폐쇄된 도로 상에 집이라고는 우리 집 한 채뿐이니 자연스레 이 도로는 우리 집 전용 도로가 되었다. 우리 집과 접한 구 도로의 길이가 100미터가 넘고, 빨간 말뚝이 말해주듯 도로에서 3미터는 노견이니 그동안 그 넓은 면적을 내가 무상으로 잘 사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도시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시골에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이런 땅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땅은 먼저 점유한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10여 년 전 이 땅을 구입했을 때 부동산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땅은 삼 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구할 수 있는 땅이에요!" 그동안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공짜로 이 땅을 잘 사용해왔는데 이제 그 행운이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대형관정 브런치.jpg 오른쪽 4차선 국도를 새로 만들면서 왼쪽 구 도로는 폐쇄되었다. 오른쪽 끝에 내가 무서워하는 빨간 말뚝이 보인다.


이 노견의 경계지점에 빨간 말뚝을 박아놨으니 다시 도로를 복원하려는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 동네에 들어온 공장에서 현재 사용 중인 도로가 불편하다고 민원이라도 넣은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노견에는 우리 집 아로니아 나무도 일부 심어져 있다.


그까짓 아로니아는 뽑아버리면 그만이라지만, 정작 문제는 도로가 복원되면 큰 화물트럭이 우리 집 앞을 휘젓고 다니게 된다는데 있다. 집 뒤쪽 4차선 국도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도 시끄러워 창문을 닫고 사는데, 이제는 큰 화물 트럭이 집 앞쪽으로도 다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갑해졌다. 더구나 우리 집 위치가 다소 높으니 아래 큰 도로와 연결하려면 급한 경사로를 만들어야 하고, 큰 도로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우리 집은 아마도 절벽 위에 세워진 집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아! 개발이 무섭다. 이제 이사를 가야 하나?


노견 브런치.jpg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우리 집 전용도로가 100미터가 넘는다. 그래서 이 좋은 곳을 두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마음이 전혀 없다.


며칠 후, 과수원 끝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이므로 급히 나가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야 대책이라도 세우지.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내막인즉 수자원공사에서 지역마다 지하수의 양과 수질을 점검하는 곳을 만드는데, 충주에서는 이곳이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형 관정을 파려는데, 정확한 도로의 경계를 파악하기 위해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이 관정은 수자원을 관리하는 목적도 있지만, 유사시에는 주민들이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한다.


"아!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하셔야죠." 천만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대형 관정 팔 때 물이 좀 필요한데, 혹시 사용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셨다. "과수원에 지하수 있어요. 얼마든지 쓰셔도 돼요".


먼지 날리고 시끄럽게 일한다는데 군말 없이 우리 집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거의 보지 못했을 거다. 또 수고하신다고, 드시라고 대추도 갖다 드렸다. 아무튼 그분들 감동했을 것 같다.


이제 정부에서 큰돈 들여 대형관정을 파고 수질 검사하는 곳까지 만들었으니 끊어진 도로를 다시 연결할 일은 없을 것이다. 큰 트럭들이 우리 집 앞을 휘젓고 다닐 일도 당연히 없다.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마음 편히 살아도 된다. 덤으로 긴 2차선 아스팔트 도로는 앞으로도 우리 집 전용 도로일 테고, 3미터 폭의 노견도 전부 다 내 것이다.


흐흐흐.

이 음흉한 내막을 저분들은 모르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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