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이 다른 재즈피아노 곡 'Waltz for Debby'를 아시나요?
살다 보면 "어?" 하고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을 만난다. 그런 사람도 만난다. 그런 음악도 만난다.
음들이 하나하나 마음속에 내리 꽂히는 음악을 만난다. 때로는 실로폰같이 청량하게, 때로는 드럼 소리같이 묵직하게 내 마음을 확실하게 두드리는 곡이나 연주를 마주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어도 우리는 그런 곡들을 '알아본다.'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시키는 마법을 부려대는 그런 곡들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다. 나를 호출한 음악에 화답이라도 하듯, 우리는 작곡가나 연주자에 관심을 뻗치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알게 되었다. "재즈계의 쇼팽"이라는 별명을 가진, 쿨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Bil Evans)를. 그리고 약간 과장해서 백 번은 들은듯한 그의 전설적인 연주곡 왈츠 포 데비 (Waltz for Debby)를.
빌 에반스와 그의 연주들은 그렇게 내게 '발굴'되었다. 100프로 장담할 수 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 나는 Waltz For Debby를 찾고 또 찾아갈 것이란 걸. 에반스 연주는 정기적으로 나를 호출할 것이고 나는 매번 곁을, 시간을, 내어줄 것이라는 걸. Waltz for debby라는 곡 제목도 몰랐을 때, 아니 빌 에반스라는 재즈 피아니스트 존재도 몰랐을 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곡을 들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이 곡은 나를 멈춰 세웠다. 이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유튜브에서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 영상을 접했다. 재즈 피아노계에 레전드 중 하나로 남아있는 이 영상을.
마법 같은 이 곡과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에 나는 단숨에 매료되었다.
이 곡은 속된 말로 "때깔이 다르다." 촘촘하게 천천히 차오르는 빛 같달까? 성실한 엘리트처럼 단정한 모습을 한 빌 에반스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한껏 말린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피아노와 기필코 하나가 되고야 말겠다는 마음의 표식일까? 건반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말겠다는 다짐의 징표일까? 시냇물이 힘 하나 안 들이고 졸졸졸 흘러가듯 건반 위를 흘러 다니는 그의 손가락을 보면, 억지스러움 하나 없이 저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진짜 예술이구나 싶다.
빌 에반스는 기교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상상력을 피아노로 그려갔다. 그는 재즈 이전에 드뷔시나 라벨 같은 인상주의 클래식 음악으로 내공을 쌓았다. 그런 의미에서 빌 에반스가 "인상파 재즈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건 당연해 보인다.
"사람들이 재즈를 지적인 이론으로 분석하려고 할 때 난 당혹스럽다.
재즈는 느낌이다."
-빌 에반스-
에반스 연주에는 차별화된 느낌이 있다. 테크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고급스럽고 서정적인 그만의 '쪼'가 있다고나 할까? 빌 에반스만이 그려낼 수 있는 빛깔, 분위기, 무늬일 것이다. 재즈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세련되고 클래식한 음악 골조위에 케이크 위 체리처럼,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꽂힌 별장식처럼, 근사하게 놓여있다.
그의 연주는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메시지를 또렷이 들리게 하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을 연상시킨다. 호들갑 떨지 않고 과묵하지만 어디서든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고야 마는 높은 자존감과 단단한 내면을 지닌 누군가를 닮았다.
빌 에반스 재능을 일찍이 간파한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의 <Kind of Blue>(1959) 앨범 세션에 빌 에반스를 기용했다. 그러나 에반스는 애초에 피아노 트리오에 지향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신인이었던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Scott Lafaro)와 드러머 "폴 모띠앙"(Paul Motian)과 재즈 트리오를 결성한다.
세 멤버는 Portrait of Jazz (1959), Exploration (1960)등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리고 재즈 역사상 최고의 인터플레이라 극찬을 받는 빌 에반스 트리오를 이끌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빌 에반스 트리오가 Waltz For Debby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악기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조곤조곤 주고받다가 수다를 떨다가 침묵하기도 하는.
빌 에반스 트리오에는 '갑과 을'이 없어서 좋다.
베이스와 드럼이 피아노 연주를 위한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동등하고 강력한 무대 파워를 지닌 주연들로 느껴진다. 빌 에반스 트리오는 총 네 장의 앨범만을 남겼다. 천재 베이시스트였던 스콧 라파로가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실황 공연 직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환상의 트리오는 깨지고 만다.
에반스는 예기치 않은 친구의 죽음에 자신의 지축이 뒤흔들리는 고통과 실의에 빠졌다. 게다가 형과 아내가 자살하는 비극도 겪는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새 멤버를 영입해 새로운 트리오를 결성하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하지만 전설적인 천상의 호흡을 보여줬던 첫 빌에반스 트리오 명성엔 미치지 못한다.
서정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했던 에반스는, 1980년 녹음한 'Letter to Evan'(이반에게 보내는 편지) 곡을 끝으로 음악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Evan 은 아들의 이름이다.)
빌 에반스는 지금 없지만, 일면식 없는 한국에 사는 내게 이 순간 아늑한 행복감을 전해주는 그의 음악을 생각하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의 위대함을 느낀다.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을 때마다, 나는 에반스가 연주하는 동영상을 찾아본다. 그의 능숙한 손가락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기나긴 세월 동안 중첩된 그의 노력이 파노라마처럼 읽힌다. 건반의 달인 빌 에반스 연주 영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된다.
그리고 매번 생각한다. 나도 내가 잘하고 싶은 영역의 숙련도를 저 정도로 끌어올리고 싶다고.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투입해야 할 노력의 기본값을 정직하게 지불하겠다고. 빌 에반스 연주처럼 깊은 내공이 실린 인생을 살기 위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