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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Dec 10. 2021

그 이야기들이 생각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쓰려고 하는 글보다 먼저 자리하고 있는 이야기.

다시 뭔가를 쓰려고 할 때 그 이야기들이 생각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구간에서 어떤 얘기를 어떤 호흡으로 할지 이미 알면서도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가장 선명한 정신일 때에도 그 목소리를 찾았고 불면에 지쳐 너덜거리는 몸이었을 때에도 그 목소리를 재생했다.


왜인지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재생이 안됐다. 나처럼 잃은 목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잃기 전에도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 없이 나는 다시 쓸 수 있을까. 우선 나를 헤집어 그것들에 대한 가능한 정확한 기억을 꺼내놓고 싶다.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책이, 어떤 음반이, 어떤 메모가 필요해질지 모르기에 무리해서 남겨둔 것들이 많다. 버리지 못하는 건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의 어떤 부분도 같이 버리는 것이 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두 시간가량 들려주던 문학 이야기는 물음이면서 답변이었고 눈물이면서 환한 웃음이었다. 이 생각은 작년과 재작년 실종자를 수색하면서, 전철연의 시위 현장에 출동하면서, 군경 합동훈련을 하면서, 방독면을 쓰면서 가장 많이 했다.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진동한다고 느낀 건 7년 전 봄이 지나고 가을 즈음의 에피소드에서였다. 진은영 시인의 글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를 낭독할 때. 이 글은 당해 10월에 출간한 [눈먼 자들의 국가]에 수록되었지만, 일부러 책에서보다 먼저 글이 실렸던 가을호 문예지를 찾아봤다. 낭독이 아니었다면 나는 연민과 수치심을 길게 생각하지 못했을 테고, “시인들은 질문”이라는 보즈네센스키를 몰랐을 테고, 죽음을 겪은 후 남겨진 유가족들이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브레히트)”과 닮았음을 떠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잔해 속의 벽돌 하나를 들고서 자기 집이 한때 어땠는지 기억하려는 사람. 무엇이 그 집을 부쉈는지 알고 싶은 사람...”



가끔만 변하는, 그래서 거의 변함이 없다고 느껴지는 그 목소리는 나한테 뭔가를 쓰라고 건네는 연필 같았다. 쓰려고 하는 글 앞에서 써야만 하는 이 이야기가 먼저 자리했다. 이젠 시작되지 않는 목소리 앞에서 그 얘기를 이어갈 만한 말들을 적고 싶다. 그게 처음 꺼냈던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일지라도.


*부기: 12월 16일 목요일 우연히 팟캐스트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확인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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