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황유원 시인의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을 읽고 한 성긴 생각들. 음악적 모티브가 풍부한 시들. 즉흥과 확장, 침묵과 소음의 교차. 아르보 패르트와 그의 음악이 시집 곳곳에서 인용되며 시와 조응한다.
키스 자렛과 게리 피콕, 폴 모션의 1992년 9월 라이브 앨범 『At the Deer Head Inn』(발매는 1994년)에서 비롯한 「사슴 머리 여인숙에서」도 음악과 함께 상상하며 들었고. 마침 작년에는 위 앨범과 같은 날 녹음한 라이브 『The Old Country』가 늦게 발매되기도 했다. 세 연주자가 함께한 최초이자 마지막 연주. 시간과 기억은 이렇게 이어지기도 하는구나 싶다.
[수음(受音)하는 존재: 침묵과 소음에 대한 변주곡]
독일의 현대음악 레이블 ECM은 자신들의 음악이 희망하는 가치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이 문장은 침묵을 아름다움의 극점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 아름다움의 반대편에 가 본 사람만이 어느 자리에 서있어도 그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황유원은 『초자연적 3D 프린팅』(문학동네, 2022)에서 생활과 현실의 소음을 증폭시키며 세상의 불균질한 멜로디를 포착했다. 이후 시집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에서 그는 소음의 위상을 뒤집으며 침묵의 길을 상상한다. 이 역위상(Anti-phase)은 삶의 소음을 상쇄시키고 ‘없음’만이 다가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둔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 「백지상태」 부분
『하얀 사슴 연못』에서 백지는 단순히 처음의 상태가 아니다. 황유원은 백지가 생산된 것임을 강조하며 이것이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백지상태」에서 화자는 백지를 “내가 쓴 것”이라고 선언하며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생산된 새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백지는 무에서 존재로 넘어가는 경계의 장이며, 동시에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생산의 결과물이다. 백지를 통해 그는 이름이 없던 것을 새롭게 호명한다. 이는 「별들의 속삭임」에서도 잘 나타난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건 아마
야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
별들의 속삭임은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
그것은 가청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원음에 가깝게 재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아름다움이고
- 「별들의 속삭임」 부분(강조는 인용자)
시인은 야쿠트인들이 별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속삭임’이라고 명명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창조적인 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별들의 속삭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로 묘사된다. 여기서 lo-fi는 불완전함과 미약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태도를 상징하며, 소리의 본질과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인의 시각을 반영한다.
황유원은 다양한 시인들의 시편을 모티브로 하여 시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의 인용은 시간을 가로질러 세계의 만남을 이뤄낸다. 이 만남은 콘트라팩트(Contrafact)다. 특정 곡의 화성 진행을 참고하여 새로운 곡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곡을 만들 당시 애초에 이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있고, 솔로 연주나 즉흥 연주 때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황유원의 시적 콘트라팩트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정지용의 『백록담』이나 김종삼의 「꿈속의 나라」, 송승환의 「에스컬레이터」 등 황유원의 시적 모티브는 시대를 가로지르며 여러 시 속에 위치한다. 이를테면 「썰매와 아들」에서 시적 화자는 송승환의 시구절 “썰매에 짐을 싣고 아들을 태운다”를 “썰매에 잠을 싣고 아들을 태운다”로 잘못 읽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시는 잠과 짐을 포개며 시적 의식에 태워 보낸다. 표제시 「하얀 사슴 연못」은 애초에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연/사슴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여기 없었”던 사슴을 상상하는 일은 시가 조명하는 프레임 밖의 사각지대를 보충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유원은 시가 (비)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상상의 공유 지대를 망설임 없이 그린다.
또한 그의 시는 해체를 도모한다. 「Summa」에서 시적 화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밤에 부는 바람은 꼭 하늘에서 찢긴 바람들 같고/찢긴 채로 대기 중에 마구마구 휘날리는 종이들이 다시는 전집으로 환원되지 않게 하소서/그것들이 바로 내 마음이게 하소서”. 하지만 침묵의 아름다움과 엄결함 만이 그의 시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음의 불순함을 넌지시 언급한다. 이 소음은 일상적이다. 이를테면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백색소음」) 같은 것. 이 감각들은 치환된다. “건조기에 넣고 돌린 수건들처럼” 따스하고, 이것은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방금 막 열심히 지운 지우개의 가루” 역시 따스하고, 이 촉각은 “집에 불이 난 꿈”이라는 환상으로 이어진다. 백색은 여전히 침묵처럼 지고의 가치이고, 중간계에 위치한 ‘백색소음’은 어떤 가능성을 껴안고 있다.
황유원은 음악과 침묵 사이의 긴장감을 시적 세계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타불라 라사」에서 그는 음악보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된 상태, 즉 열린 감각을 의미한다. 시인은 리허설 첫날 연주자들이 “음악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빈 공간과 침묵 속에서도 음악이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라는 표현으로 극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침묵을 단순한 정지 상태가 아니라, 음악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으로 바라본다. 이 침묵은 가장 정결한 상태이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활동적 공간이다. 그는 침묵 속에서 소리와 음악이 새롭게 발생하는 가능성을 상상하며, 음악과 침묵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동시에 불완전함과 미약함 속에서 발견되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수음하고, 그렇게 기록된 흔적을 시로 치환한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의 짧은 파장을 딛고 서서 예각의 첨예함으로 시의 태피스트리를 조직한 황유원의 긴 파장은 익숙하지만 낯선 선율을 예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