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다시 쓰는 일
*연재 하루 일찍 올립니다!
자주 균형을 말한다. 균형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미덕이다. 톤 밸런스, 투구 밸런스, 밸런스 좋은 커피, 균형을 잃지 않는 마음 등등. 왜일까? 균형을 알기 위해서는 불균형을 먼저 떠올려봐야 한다. “어느 편으로 치우쳐 고르지 아니함”. 그렇다면 ‘고르다’는 건 무얼까? “여럿이 다 높낮이, 크기, 따위의 차이가 없이 한결같다”. 결국 불균형은 일관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관되지 않고 흐트러진 상태가 불균형인 것이다. 당연히 일관되고 정돈된 상태는 균형일 테고. 일관성은 얻어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즉 무언가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로 드러나는 것이지 결괏값은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변하는 상태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나 자세 같은 게 있다면 그 사람의 일관성은 드러난다. 하지만 일관성이 균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편향된 일관성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쭉 이어진다면 그것 역시 일관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균형을 위해 남은 조건은 치우치지 않는 것, 돌출하지 않는 것이다. 짜임새 있게 완결된 모습이 연상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여기에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을 덜어내거나 지우는 결기 같은 것도 필요하겠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걸 적절히 솎아 내고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연결시키는 일이 균형의 필수적인 단계다. 균형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내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뭐가 좋다더라’는 힘이 없어진다. ‘좋다더라’는 입장을 위한 경사로가 될 수는 있지만 문 안쪽의 모습을 대신해서 상상해 주진 않는다. 내가 좋아하고 내게 좋은 걸 찾아야 한다. 그 좋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결국 치우쳐야 한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수학에서의 편향은 “수치, 위치, 방향 따위가 일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정도나 크기”를 가리킨다. 삶과 생활에서 나의 좋음을 위해서는 기준을 새로(혹은 다시) 써야 한다.
재즈에서 스탠더드는 중요한 개념이다. 재즈 연주자들이 레퍼토리를 구성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더 나은 연주를 위해 숙지해야 할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재즈 스탠더드는 연주자와 듣는 사람들이 ‘좋음’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한 곡을 두고 여러 다른 연주를 비교해 들어볼 수 있고, 거기서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참고가 된다. 이 기준의 가치를 벼려 깊이를 만들어가는 연주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키스 재럿의 스탠더드 트리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기준을 참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연주를 통해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 이는 무조건적인 새로움이 아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새로움에 접근하는 일을 상상하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키스 재럿에게 스탠더드 트리오를 제외한 가장 큰 영역이 솔로 즉흥 연주에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하는 기준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과 그 기준과 가장 멀리 떨어지는 일. 이 두 가지는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온전한 의미의 편향이 이 연주자 안에는 있다. 기준에서 벗어난 치우침은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이고 그 쏠림은 무엇보다 박차고 나아가는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은 균형과 거리가 멀지만 어쩌면 그 힘으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곳에 발을 딛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곳을 비로소 자신만의 영역, 경지境地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곳을 일구는 이에게 미덕을 운운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 균형은 그 거리감에서 나온다. 경지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써 등장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균형을 이해하기에 앞서 편향을 바라야지만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편향은 나쁜 게 아니다. 다만 멈춰있는 편향과 균형은 굳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나의 편향은 움직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