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일 화요일의 기록
내가 초등학생 때 즈음이었나, 아빠가 1988년부터 다닌 신문사를 나오기 얼마 전에 집에 신문을 들고 왔다. 아마 신문사에서 일하니 무수히 많은 신문을 가지고 왔겠지만 기억나는 순간은 그때가 유일하다. 그 신문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이 한 문장뿐이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빠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알게 됐다. 이는 켄 로치의 영화와 처음 만난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사로잡힌 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는 생각도 든다.
켄 로치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가진 부분은 경제적 불평등과 무산계급이 지니게 되는 인권문제, 그리고 노동운동과 제도의 허점에 대응하는(하지 못하는) 개인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삶이 형성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결여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포착하면서 현실의 민낯을 들춘다(이러한 관심은 평생 노동자였던 켄 로치 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들 켄 로치가 내용에 집중하고 형식의 중요도를 간과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형식을 수용하고 드러내는 방식을 놓친 판단이다. 켄 로치가 사실적 표현을 위한 접근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맞지만, 그의 시도는 다년간의 일관된 주제의 작업을 이어오면서 바깥으로 드러나던 형식이 영화의 심층에 내재화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선 형식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작품을 살펴본다.
켄 로치의 초기작 중 하나인 텔레비전 드라마 <캐시 컴 홈 Cathy Come Home>(1966)은 캐시(캐롤 화이트) 가족이 실직과 산업 재해, 사회 안전망의 작동 불능을 통과하며 무너져가는 이야기이다. 켄 로치는 이 작품을 16미리 필름으로 만들었다. 또한 스튜디오가 아닌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핍진한 이미지를 담는 동시에 보편성을 지닌 공간을 제시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발붙이고 사는 장소를 보여주는 것에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엿볼 수 있다.[1] 이렇게 인물이 머무는 곳이 공간이 아닌 장소가 되는 이유는 공간에는 시간이 배제되어 있고 장소에는 시간이 개입하기 때문이다.[2]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무지향의 공간에도 어떤 사람이 머무느냐에 따라 의미를 획득하여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캐시 컴 홈>에서 제시되는 공간들은 인물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에서 빌린 곳(임대주택)이자 잠깐 머무는 곳(임시주거시설)이다. 하지만 영화의 시간성과 더불어 캐시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이곳은 장소가 된다.
또한 주목할 부분은 보이스 오버다. <캐시 컴 홈>에서의 보이스 오버는 주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은데, 극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아닌 특정할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하는 것은 예외적이다.[3] 이는 서사적 이음매를 돌출 시키면서 극 몰입을 방해한다. 이 방해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뉴스처럼 느끼게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속 현실을 뉴스 속 현실, 곧 우리의 현실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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