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익숙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구글 드라이브를 열었습니다. 고객사 폴더로 들어가고, 연도별 폴더를 뒤지고, 키노트 파일을 하나씩 열어봤습니다. "이건 아닌데." 닫습니다. 다른 폴더를 엽니다. 또 아닙니다.
45분 만에 "이것 같은데…" 하는 파일을 겨우 찾았습니다. 100% 확신은 없었습니다.
15년간 강의를 하면서 만든 키노트 파일이 2,000개가 넘습니다. 고객사별 제안서, 커리큘럼, 계약서까지 합치면 수만 개입니다. 분명 어딘가에 있는데, 그 어딘가를 찾는 게 매번 고역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B2B 마케팅이라는 주제를 블로그에서는 이렇게 썼고, 유튜브에서는 저렇게 말했고, 책에서는 또 다르게 정리했습니다. 강의 슬라이드에는 핵심 프레임워크가, 고객 제안서에는 실전 적용 사례가 들어있습니다. 전부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것인데, 정작 저도 전체를 한눈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15년간 만든 모든 것을 AI가 기억해준다면?
그래서 지난 주말, 3일간 컴퓨터 앞에 붙어 살았습니다.
기술적으로는 RAG라는 것을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Retrieval-Augmented Generation의 약자인데, 쉽게 말하면 '내 자료를 전부 기억하는 AI 비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AI가 답변할 때 제 데이터를 직접 참조해서 대답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단순합니다. 자료를 넣고, 의미를 입히고, 검색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첫째 날은 강의자료와의 전쟁이었습니다.
키노트 2,023개를 PDF로 변환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500개쯤 변환했을 때 멈췄습니다. 파일명에 괄호나 특수문자가 들어간 녀석들이 에러를 뿜었습니다. 15년간 별 생각 없이 지은 파일명들이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Claude Code라는 AI 코딩 도구에게 물었습니다. "특수문자 파일명도 처리하는 스크립트 만들어줘." 5분 만에 해결됐습니다. 예전이라면 개발자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스택오버플로우를 반나절 뒤졌을 일입니다.
PDF 변환이 끝나고, 각 슬라이드에서 텍스트를 추출했습니다. 한 파일당 평균 36장. 2,023개 파일에서 7만 3천 장의 슬라이드 텍스트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뽑아놓고 보니, 쓸모없는 데이터가 꽤 섞여 있었습니다. 슬라이드 번호만 적혀 있거나, 말줄임표 하나만 덩그러니 있거나, 아예 빈 텍스트인 것들. 이런 노이즈가 8천 개 가까이 됐습니다. 검색할 때 쓰레기 결과가 올라오면 안 되니까, 과감하게 정리했습니다.
강의자료 다음은 고객 폴더였습니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 포스코, 효성… 15년간 교육을 진행했던 기업마다 폴더가 있고, 각 폴더에는 교육 제안서, 맞춤 커리큘럼, 사전 분석 자료, 계약서가 들어있습니다. 이것들을 전부 텍스트로 바꿔서 데이터베이스에 넣었습니다. 6만 7천 건이 추가됐습니다.
밤 11시, 첫째 날이 끝났습니다. 데이터베이스에 14만 건의 레코드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밤 11시, 첫째 날이 끝났습니다. 데이터베이스에 14만 건의 레코드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 커피를 내리면서 생각했습니다.
강의자료와 고객 파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라는 사람의 지식은 키노트 안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블로그에도 있고, 유튜브에도 있고, 책에도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연락처에도 맥락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날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강의자료 바깥의 모든 것을 넣는다.
구글 주소록 8,590명을 먼저 넣었습니다. 이름, 회사, 직책, 이메일. 단순한 연락처 같지만, 여기에 벡터를 입히면 "삼성전자 마케팅팀에서 만났던 사람"이라고 검색해도 관련 인물이 유사도 순으로 올라옵니다.
네이버 블로그 499개를 크롤링했습니다. 2012년부터 꾸준히 써온 B2B 마케팅, 세일즈, 협상 관련 글들입니다. 유튜브 영상 215개의 자막과 댓글도 추출했습니다. 제가 카메라 앞에서 했던 말들이 전부 텍스트로 검색 가능해진 것입니다.
제가 쓴 책 《B2B 마케팅 설계》는 345개 조각으로 나눠서 넣었습니다. 브런치에 올린 에세이 200개, 홈페이지 칼럼 10개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니, 데이터베이스 안에 제 15년이 통째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강의 슬라이드 7만 3천 장, 고객 파일 6만 7천 건, 연락처 8,590명, 블로그·유튜브·책·브런치·칼럼까지. 어딘가에 흩어져 있던 제 지식의 파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밤이 되니, 데이터베이스 안에 제 15년이 통째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강의 슬라이드 7만 3천 장, 고객 파일 6만 7천 건, 연락처 8,590명, 블로그·유튜브·책·브런치·칼럼까지. 어딘가에 흩어져 있던 제 지식의 파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셋째 날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데이터를 넣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AI가 '의미'를 이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걸 벡터화라고 합니다.
일반 검색 엔진은 키워드 매칭입니다. "마케팅"을 검색하면, 정확히 "마케팅"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문서만 찾아줍니다. 하지만 벡터 검색은 다릅니다. "고객에게 우리 제품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이라고 물으면, "마케팅"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강의자료도 의미적으로 관련 있으면 찾아냅니다.
15만 건이 넘는 텍스트에 1,024차원의 의미 벡터를 입히는 데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먹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추가했습니다. 벡터 검색만으로는 고유명사를 잘 못 잡습니다. "현대위아"나 "삼성전자" 같은 이름은 의미보다 정확한 글자 매칭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벡터 검색과 키워드 검색을 동시에 돌리는 하이브리드 검색을 만들었습니다. 의미가 비슷한 건 벡터가 찾고, 정확한 이름은 키워드가 찾습니다.
모든 세팅이 끝났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현대위아"를 입력했습니다.
2.6초.
화면에 결과가 쏟아졌습니다. 현대위아의 매출액 1조 9,224억 원, 영업이익률 6.4%, 서산엔진공장 확대, 멕시코 공장 진출 계획까지. 3년 전 고객 폴더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던 분석 자료를 AI가 알아서 찾아준 것입니다. 출처도 표시됩니다. "고객파일 — 현대위아 관련 분석자료."
예전이라면 45분이 걸렸을 일이, 2.6초 만에 끝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건 다음이었습니다. "B2B 마케팅 전략"을 검색했습니다.
제 강의자료에서 관계 중심 마케팅 슬라이드가 올라왔습니다. 유튜브에서 강의한 B2B 마케팅 AtoZ 영상의 자막이 함께 나왔습니다. 고객 제안서에 넣었던 마케팅 전략 파트가 추가됐습니다. 블로그에 정리했던 사례까지.
15년간 서로 다른 매체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형태로 만든 콘텐츠가 하나의 질문 아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을 보는 순간, 솔직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건 검색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제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건 검색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제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뒤로 업무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육 제안 요청이 들어오면, 예전에는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고객사 홈페이지 방문해서 분석하고, 구글 드라이브에서 과거 유사 자료를 찾고, 커리큘럼을 수정하고, 강사 프로필 붙이고, 제안 메일을 씁니다. 3시간입니다. 이게 매주 2~3건씩 반복됩니다.
이제는 RAG에 "○○기업 대상 B2B 세일즈 교육"이라고 검색합니다. 과거에 비슷한 업종에서 진행했던 교육 이력, 그때 사용한 자료, 고객 정보가 즉시 올라옵니다. 커리큘럼 생성기와 메일 자동 생성기도 이 RAG와 연동되어 있어서, 30분이면 제안서가 완성됩니다.
6배 빨라진 것도 좋지만, 진짜 변화는 품질입니다.
과거에는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그때 그 자료가 어디 있었는데…" 하면서 절반쯤 기억나는 내용으로 제안서를 썼습니다. 제 15년 치 경험 중 실제로 활용하는 건 기껏해야 20~30%였을 겁니다. 나머지는 하드디스크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AI가 15만 건의 데이터에서 가장 적합한 내용을 찾아줍니다. 제 경험과 지식을 100% 끌어다 쓰는 제안서가 나옵니다.
RAG를 만들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도 발견했습니다.
2,000개 강의를 14개 카테고리로 자동 분류했더니, 제 포트폴리오가 숫자로 보였습니다. AI 관련 슬라이드가 2,010장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 다음이 B2B마케팅 1,854장, 동영상제작 1,596장, TRIZ/창의력 984장. 감으로 "나는 B2B 마케팅을 제일 많이 가르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데이터는 AI를 더 많이 다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재설정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015년에 만든 협상 강의자료를 다시 만난 것도 뜻밖이었습니다. "협상 전략"을 검색했더니, 11년 전 자료가 올라왔습니다. 만들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현재 교육에 재활용했습니다.
이게 RAG의 숨은 가치입니다. 내가 잊은 것까지 AI는 기억합니다. 잊혀진 자산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슬라이드 이미지 3만 2천 장도 함께 올렸습니다. 검색 결과에 텍스트만 나오는 것과, 실제 강의 슬라이드 이미지가 함께 뜨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이미지를 보는 순간 "아, 그때 그 강의!" 하고 맥락이 한꺼번에 떠오릅니다.
여기서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개발자가 아닙니다. HTML이 뭔지는 압니다. 간단한 코드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거나, 벡터 인덱스를 최적화하거나, 하이브리드 검색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건 제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3일 전까지는요.
Claude Code라는 AI 코딩 도구가 모든 걸 바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이것입니다. "데이터베이스 만들어줘." "여기에 벡터 검색 추가해줘." "키워드 검색이랑 합쳐서 하이브리드로 만들어줘." "검색 속도가 느린데 최적화해줘." 이런 식으로 한국어로 대화했을 뿐입니다. AI가 코드를 쓰고, 에러를 고치고, 테스트하고, 배포까지 했습니다.
99%는 AI가 작성한 코드입니다. 제 역할은 "뭘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은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뭘 원하는지는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15년간 업무 현장에서 느꼈던 불편함, 이러면 좋겠다 싶었던 것들 — 그 경험이 설계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월 비용은 29달러입니다. 데이터베이스 호스팅 25달러, 코드 저장소 4달러. 텍스트를 벡터로 바꿔주는 임베딩 서비스는 무료입니다. 커피 다섯 잔 값으로, 15년 치 지식을 24시간 쉬지 않는 AI 비서에게 맡긴 셈입니다.
월 비용은 29달러입니다. 데이터베이스 호스팅 25달러, 코드 저장소 4달러. 텍스트를 벡터로 바꿔주는 임베딩 서비스는 무료입니다. 커피 다섯 잔 값으로, 15년 치 지식을 24시간 쉬지 않는 AI 비서에게 맡긴 셈입니다.
1인 기업을 10년 넘게 운영하면서, 혼자라는 게 늘 약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기업은 부서가 있습니다. 자료를 관리하는 사람, 제안서를 쓰는 사람, 영업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걸 혼자 합니다. 강의도 하고, 영업도 하고, 제안서도 쓰고, 회계도 합니다.
그런데 AI와 함께하니, 혼자라서 오히려 빠릅니다.
결재를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회의를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IT 부서에 요청서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만들어줘" 하면 30분 안에 나옵니다. 마음에 안 들면 "이 부분 고쳐줘" 하면 5분입니다. 대기업이라면 이 과정에 몇 주가 걸렸을 것입니다.
1인 기업의 민첩함과 AI의 실행력이 만나면, 규모의 불리함이 사라집니다.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느낌. 이게 지금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1인 기업의 민첩함과 AI의 실행력이 만나면, 규모의 불리함이 사라집니다.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느낌. 이게 지금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주 기업에서 AI 교육을 할 때, 이 RAG 시스템을 실제로 보여줍니다.
검색창에 질문을 입력하고, 2~3초 만에 강의자료와 고객 데이터와 블로그 글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걸 보여주면, 교육장이 잠시 조용해집니다. 그리고 곧 질문이 쏟아집니다.
"우리 회사도 저거 만들 수 있나요?"
"저건 개발팀한테 맡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대기업은 이미 수십억을 들여 사내 RAG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팀은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용이 걱정되고, 기술이 어려워 보이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월 3만 원이면 됩니다. 개발자가 아니어도 됩니다. AI 코딩 도구가 있으면 됩니다.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내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입니다.
여러분의 회사에도 서버 어딘가에, 공유 드라이브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안서, 보고서, 회의록, 매뉴얼, 고객 응대 기록. 그것들은 잠들어 있는 한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AI에게 먹이는 순간, 살아 움직이는 지식 자산이 됩니다.
다음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통화 녹음을 자동으로 텍스트 변환하는 시스템, 페이스북과 링크드인 게시글 연동이 대기 중입니다. 이것까지 들어가면, 제가 15년간 만들고, 쓰고, 말하고, 공유한 모든 것을 AI가 기억하게 됩니다.
얼마 전 수강생 한 분이 교육이 끝나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표님은 AI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AI와 함께 일하는 방법을 보여주시네요."
맞습니다. AI는 도구입니다. 도구는 쓰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15년간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AI를 만나면, 그 경험이 몇 배로 증폭됩니다. 하지만 경험 없이 AI만 가져다 쓰면, 그건 빈 껍데기입니다.
AI 시대에 진짜 경쟁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축적된 경험 곱하기 AI 활용 능력. 경험이 0이면, 뭘 곱해도 0입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 AI를 만났을 때, 그 곱셈의 결과는 상상 이상입니다.
저의 3일은, 그 곱셈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