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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혁 강사 Dec 17. 2023

B2B벤더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2

1) 환경 ③ 이자비용 ④ 기술변화주기

③ 이자비용

'두산인프라코어'라는 회사를 아시나요? 1937년 일제시대에 설립되어 일본군에 군용장비를 납품하던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가 광복후 공기업으로 사업을 진행하다가 1963년 회사명을 '한국기계공업(韓國機械工業)'으로 변경했습니다. 1976년 대우그룹에 인수되어 '대우기계'와 합쳐져 '대우중공업'이 되었죠. 2005년 '두산중공업'에 인수되어 '두산인프라코어'로 회사명을 변경했습니다. 두산그룹은 OB맥주와 코카콜라등 B2C중심 사업구조를 1991년 낙동강 페놀유출 사태로 존립의 위기를 맞이한 이후 B2B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전환했습니다. 2007년에는 굴착기, 지계차, 압축기, 발전기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건설 기계회사 '밥켓'외 2개사를 한국기업의 역사상 최대금액 기록인 한화 5조원대로 인수했습니다. 인수했던 기업들은 연매출26억달러, 영업이익 3.7억달러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견 타당한 액수였죠. 

문제는 '시기'였습니다. 2007년 말 5조원대의 M&A를 완료하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39억달러를 빌려서 인수했기 때문에 연간 이자비용만 3천억원에 가까웠는데 영업이익은 그에 못 미쳤고, 총차입금의 규모는 인수하기 전의 1.3조원대비 7조원 규모로 5배 넘게 불어났습니다. 인수 3년이 지난 2011년 부터 미국의 건설시장에 훈풍이 불어 두산 인프라코어와 두산 밥캣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만 두산건설이 만든 아파트와 상업용 건물에 대규모 미분양 사태가 일어나 10년간 약 3조원대 손실을 기록하여 두산그룹에 치명타를 날립니다. 이후 2020년 현대중공업이 이 회사를 인수하여 '현대두산인프라코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다가 2023년 'HD현대인프라코어'로 사명을 바꿨습니다. 


두산그룹이 2004년 인수한 '두산건설'과 2007년 인수한 '두산인프라코어'는 기업인수 실행시기 선정, 시장분석 실패로 인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최악의 시기에 빌린 엄청난 자금과 그에 따른 이자비용으로 인해 크게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높은 이자비용은 순이익을 감소시키고, 신용등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재무 건전성을 나쁘게 만들어 연구개발과 시장확대, 투자에 사용할 자금이 부족하게 만들기 때문에 해당기업을 고객사로 둔 B2B공급사에게도 당연히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④ 기술변화주기

2000년대 초반은 TV와 모니터의 형태가 크고 무거웠던 브라운관에서 얇고 가벼운 PDP, LCD로 빠르게 교체되던 시기였습니다. 2004년 당시 필자가 담당했던  일본의 초대형 유리제조사 '아사히글라스'의 중국 상하이 공장은 CRT 브라운관용 유리를 생산해서 저가 TV, 모니터 생산업체에 납품했었는데 당시 LCD로 빠르게 변하던 기술변화주기로 인하여 아사히글라스는 한국 구미에 LCD용 유리기판 공장을 새로이 만들고, 중국에 있던 기존의 브라운관용 유리는 생산을 줄이고 있어 해당 공장에 납품하던 산업용 공구는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급격한 기술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를 기억하시나요? 저에겐 1997년, 2009년, 2023년이 해당되는 연도들입니다. 1997년초 26개월의 병역을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면서 영어,일본어 회화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아래층이 인터넷 카페였습니다. 몇시간씩 컴퓨터앞에서 당시 웹브라우저의 표준이었던 '넷스케이프'로 주로 미국의 인터넷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흥분했었습니다. 전세계 어디든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랐었죠. 인터넷 카페는 곧 PC방으로 변했고 저의 일상은 PC와 초고속 인터넷으로 인해 크게 변했습니다. 12년이 지난 2009년 초 해외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이직을 했는데 그 회사에서 임원들에게 '갤럭시 옴니아'를 지급하는 모습을 보며 처음 스마트폰을 접했죠. 2010년 말 두번째로 이직한 회사에선 아이폰4를 지급받았습니다. 각진 금속제 외관과 레티나 디스플레이,앱스토어에서 자유롭게 다운로드 할 수 있는 다양한 앱들은 다른 차원의 사용경험을 저에게 선사했습니다. 움직이는 인터넷! 진정한 모바일이 시대가 도래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거죠. 그리고 13년이 지난 2023년 챗GPT를 접했을 때의 충격! 엄청난 규모의 인공지능이 IT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쉬게 사용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인터넷, 스마트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인간사회에 선사하겠죠? '기술변화주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기업들의 사례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코닥'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어떤 사람은 '디스커버리'와 비슷한 패션브랜드라고 하기도 합니다. 1888년 만들어진 '이스트만 코닥'은 세계 최초의 휴대용 사진기, 편리한 인화방식, 새로운 규격의 필름등을 만들며 사진기의 몸통과 렌드, 필름으로 나눠지는 변화의 시기도 순조롭게 극복하며 필름산업을 지배했습니다. 1975년 세계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회사가 '코닥'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기술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며 2012년 파산한 회사가 '코닥'이기 때문입니다. 코닥은 당시 캐시카우였던 필름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발명한 디지털카메라의 시장출시를 미루며 일부러 상용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변화를 늦출 수 있다는 자만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승자의 저주'를 뜻하는 '코닥 딜레마 (Kodak Dilemma)'라는 말이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2007년 스마트폰의 시기상조라는 맥킨지의 컨설팅을 근거로 스마트폰 시장에 적기에 진입하지 못해 해당 산업에서 2021년 철수했던 'LG전자'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그림으로 만들어진 아이콘을 누르면서 조작하는 GUI (Graphical User Interface /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지금은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로 인식하겠지만 DOS (Disk Operating System)의 검은색 바탕에서 하나하나 글자를 타이핑하며 명령어를 입력해봤던 필자가 접한 윈도우95는 말그대로 엄청난 기술혁신이었습니다. 이런 혁신적인 기술은 누가 개발했을까요? 복사기 회사인 제록스(Xerox)입니다. 1979년 제록스의 연구소였던 PARC (Palo Alto Research Center / 팔로 알토 연구소)를 방문했던 스티브 잡스가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좋은 예술가는 모방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이라는 역대급 어록을 남기며 애플에서 개발하던 컴퓨터에 GUI를 활용한 운영체제를 설치합니다. MS의 빌게이츠를 이것을 모방해 '윈도우즈'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하기도 했죠. GUI, 마우스, 레이저 프린터, 이더넷등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의 많은 부분을 이 회사의 연구소에서 개발했습니다. 제록스는 이 연구소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상용화에도 관심이 없었죠. 이메일과 전자문서 대중화라는 기술변화주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2018년 후지필름으로 흡수합병되었습니다.  


PDA가 뭔지 아시나요? Personal Digital Assistant(개인용 디지털 단말기)입니다. 스마트폰이 출시되기 전에 전자수첩 형태에서 발전해 아타리, 애플등의 회사에서 초기제품을 출시한 이후 1996년 '손바닥'이라는 뜻의 Palm사에서 출시한 '파일럿1000'이라는 제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배터리가 오래갔고 작고 휴대용으로 좋아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죠. 90년대 후반부터 2천년대 초반의 짧은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이후 윈도우 모바일을 탑재한 PDA와 삼성, LG등 휴대폰 제조사가 출시한 PDA폰, 더 나아가서는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어마어마한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엔 한계점을 빠르게 드러내 버렸습니다. 자체 운영체계를 활용한 제품, 윈도 모바일을 탑재한 제품들로 다시 시장을 장악하려 했으나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출시되자 2010년 HP에 인수되어 버리며 사라졌습니다. PC와 스마트폰 사이 15년의 짧은 전성기만을 누렸던 중간다리 역할만 했었습니다. 변화하는 시장과 강력한 경쟁자들의 등장에 제대로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침몰해버렸던 사례죠. 

쿼티(QWERTY)물리 키보드가 하단에 붙어있는 모양이 블랙베리같아서 회사명도 '블랙베리'였던 캐나다의 휴대폰 제조업체를 아시나요? 데이터 암호화 기술을 활용한 강력한 보안기술과 자체 메신저, 이동중 이메일 사용기능등의 핵심 가치들로 사업을 전개해 2008년도엔 미국 휴대폰 시장 점유율이 45%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했었죠. 2007년 출시된 아이폰과 2008년 무료로 배포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때문에 비즈니스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확장된 앱생태계에서 다양한 메신저, 이메일등의 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보안기술도 발전되어 굳이 블랙베리만을 사용할 필요도 없으며, 물리 키보드로 인한 제약이 없는 경쟁제품들의 약진은 블랙베리가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하고 개발,생산,마케팅을 중국업체인 TCL에 넘기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했지만 다른 영역으로 전환할 기회는 이미 놓쳐버렸습니다. 찰나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대표적인 사례죠. 


1990년대 검색엔진중 기억나시는 것이 있습니까? "라이코스 잘 했어"라는 카피로 유명했던 '라이코스(Lycos)', 빠른 검색속도로 유명했던 '알타비스타(AltaVista)', '한글과 컴퓨터'가 만들었던 '심마니', 국내최초의 자연어 검색 서비스'엠파스', 지금도 남아있는 '다음'과 '네이버'가 생각나네요. 그중에서도 포털(Portal / 관문, 입구)사이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비스가 '야후(Yahoo)'입니다. 1994년 대만계 미국인 '제리양'이 만든 서비스죠. 한때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검색서비스 회사였습니다. 2002년 구글 인수실패, 2004년 페이스북 인수실패, 2006년 유튜브 인수실패와 2007년 아이폰으로 시작된 모바일 혁명에도 발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2008년엔 마이크로소프트가 제안한 50조 규모의 인수제의는 야후가 거부했죠. 이후 알리바바 그룹에 투자한 것이 성공을 한후 세금문제로 고민하다가 야후를 상표까지 포함해서 버라이즌에 매각해버리고 '알바타'로 회사의 이름을 바꿔 투자회사로 전향하면서 보유자산을 청산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핀란드에서 창립된 '노키아'는 빠르게 변화하는 혁신적인 회사였습니다. 초기의 사업 아이템이었던 '제지'에서 '고무', '전선'을 거쳐 1960년대부턴 전자제품을 만들며 1990년대부터 휴대전화 시장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998년에는 미국의 휴대폰 제조사인 '모토롤라'를 앞서 전세계 1위 업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는 전세계 40%의 점유율, 핀란드 GDP의 25%를 차지하기도 했죠. 2007년은 아이폰이 출시되었던 시기입니다. iOS와 안드로이드를 앞세운 혁신적인 스마트폰과 경쟁하기엔 민첩성이 떨어지고 변화에 대한 의지도 부족해보였습니다. 다수의 자체 운영체계를 탑재한 제품 및 MS의 윈도우를 탐재한 제품으로 역대급 혁신이 이뤄지던 당시 스마트폰 시장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죠. 2014년 휴대폰 사업부를 MS에 넘기며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 했으나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네트워크 장비, 데이터 센터, 소프트웨어 솔루션, 보안 서비스등을 제공하는 B2B기업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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