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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창범 Feb 04. 2016

늦겨울, 한라산

어리목 - 영실 코스

입춘이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물러간다. 오는 봄님 맞이하고 가는 겨울님 환송하러 한라산에 올랐다. 해마다 연례행사 치르듯 겨울산행을 하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기를 바랐다. 입춘이란 말이다. 그냥 평범한 날도 아니고;;;.

 

아침부터 날씨는 꾸물렁거렸고 사재비동산에도 오르기 전에 동행했던 중국 청년은 얼굴이 백지장이 돼서  나가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내려 보내고 혼자서 발길을 재촉했다. 사재비동산에 이르니 날씨가 풀릴 기미가 보였다. 

 

윗세오름 가는 길 ⓒ신창범

올라가는 길 데크에 눈도 거의 다 녹았고 아이젠을 찬 발은 삐걱거리는 나무판에 닿을 때마다 살짝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윗세오름 주변은 그래도 눈이 남아 있으려나 했는데 역시나다. 


윗세오름 가는 길 ⓒ신창범

2시간에서 2시간 반이면 윗세오름에 도착한다. 컵라면을 사 먹을 수 있고 양갱이나 초코바도 판다. 허기진 등산객이 잠시 쉬어가는 곳. 이제 영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실로 올라와서 영실로 내려가는 것보다는 어리목으로 해서 영실로 내려가는 코스가 나는 더 좋다. 가고 오는 길이 같다면 사실 좀 단조로운 면이 있다. 


영실코스로 내려가는 길에서 ⓒ신창범 


윗세 큰 오름에선 다 큰 어른들이 눈썰매 놀이에 여념이 없다. 내심 겨울 한라산의 멋진 풍광을 기대하고 온 것인데 봄은 여지없이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선작지왓에서 바라 본 백록담 ⓒ신창범

선작지왓에서 바라본 백록담. 좀 더 있다가 철쭉이 만발한 시즌이 오면 이 들판이 진한 핑크빛으로 물들 것이다. 제주 내려와서 5년여를 살면서 철쭉다운 철쭉을 본 적이 없다. 2016년엔 기필코;;;



영실로 내려가는 계단 ⓒ신창범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고 싶을 정도로 날씨는 점점 더 좋아지는데 왼발 뒤꿈치는 물집이 잡혀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내려가야 한다. 계단길을 내려가는 내내 병풍바위가 눈을  잡아끌고 아름다운 영실기암들이 손짓한다.  


병풍바위와 영실기암 ⓒ신창범

병풍바위가 오늘처럼 멋지게 보인 날도 없었던 듯하다. 발 상태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런 날에 한라산은 그래도 넓은 품을 열어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철쭉을 보러 한 번, 그리고 백록담의 찰랑거리는 물을 보러 또 한번 거기다가 제대로 설경을 보여줄 새로 올 겨울의 한라산을 기대해 본다.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내내 눈이 감긴다. 좀 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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