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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살이

늦겨울, 한라산

어리목 - 영실 코스

by 신창범

입춘이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물러간다. 오는 봄님 맞이하고 가는 겨울님 환송하러 한라산에 올랐다. 해마다 연례행사 치르듯 겨울산행을 하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기를 바랐다. 입춘이란 말이다. 그냥 평범한 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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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날씨는 꾸물렁거렸고 사재비동산에도 오르기 전에 동행했던 중국 청년은 얼굴이 백지장이 돼서 나가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내려 보내고 혼자서 발길을 재촉했다. 사재비동산에 이르니 날씨가 풀릴 기미가 보였다.


윗세오름 가는 길 ⓒ신창범

올라가는 길 데크에 눈도 거의 다 녹았고 아이젠을 찬 발은 삐걱거리는 나무판에 닿을 때마다 살짝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윗세오름 주변은 그래도 눈이 남아 있으려나 했는데 역시나다.


윗세오름 가는 길 ⓒ신창범

2시간에서 2시간 반이면 윗세오름에 도착한다. 컵라면을 사 먹을 수 있고 양갱이나 초코바도 판다. 허기진 등산객이 잠시 쉬어가는 곳. 이제 영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실로 올라와서 영실로 내려가는 것보다는 어리목으로 해서 영실로 내려가는 코스가 나는 더 좋다. 가고 오는 길이 같다면 사실 좀 단조로운 면이 있다.


영실코스로 내려가는 길에서 ⓒ신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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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 큰 오름에선 다 큰 어른들이 눈썰매 놀이에 여념이 없다. 내심 겨울 한라산의 멋진 풍광을 기대하고 온 것인데 봄은 여지없이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선작지왓에서 바라 본 백록담 ⓒ신창범

선작지왓에서 바라본 백록담. 좀 더 있다가 철쭉이 만발한 시즌이 오면 이 들판이 진한 핑크빛으로 물들 것이다. 제주 내려와서 5년여를 살면서 철쭉다운 철쭉을 본 적이 없다. 2016년엔 기필코;;;



영실로 내려가는 계단 ⓒ신창범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고 싶을 정도로 날씨는 점점 더 좋아지는데 왼발 뒤꿈치는 물집이 잡혀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내려가야 한다. 계단길을 내려가는 내내 병풍바위가 눈을 잡아끌고 아름다운 영실기암들이 손짓한다.


병풍바위와 영실기암 ⓒ신창범

병풍바위가 오늘처럼 멋지게 보인 날도 없었던 듯하다. 발 상태도 그렇고 몸 상태도 그런 날에 한라산은 그래도 넓은 품을 열어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철쭉을 보러 한 번, 그리고 백록담의 찰랑거리는 물을 보러 또 한번 거기다가 제대로 설경을 보여줄 새로 올 겨울의 한라산을 기대해 본다.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내내 눈이 감긴다. 좀 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