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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창범 Feb 10. 2016

삶 자체가 역겨운 것은 아니다.

영화 <바바라>의 니나 호스(Nina Hoss)

<바바라>는 통일독일 이전 동서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바바라 볼프라는 동독 여의사는 베를린에서 근무했었는데 출국 요청을 했다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서 시골마을로 좌천되었고, 그곳의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녀에겐 당국의 감시가 이루어지고 정기적으로 정부 요원이 들이닥쳐서 집안을 수색하고 바바라의 몸까지 수색한다.  이러한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바바라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서독의 자유 체계로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치밀한 계획하에서 '브로커'에게 줄 돈도 준비했고,  바다를 통한 탈출계획과 날짜까지 잡힌 상태. 


대략 위 내용을 보면 이 영화가 마치 한 여성의 동독 탈출기를 다룬 '첩보 스릴러물'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혀 헛짚은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내용은 영화 속 바바라는 여성의 상황 설정일 뿐 실제로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주된 이야기는 병원을 무대로 한 바바라와 그곳의 젊은 의사 안드레의 이야기이다.  바바라는 친절하고 호감이 가는 안드레 조차도 그녀의 감시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냉담하게 대한다.  그런 와중에 스텔라라는 어린 노동자 소녀가 임신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고 바바라는 그녀에게 헌신한다.  그리고 스텔라 역시 바바라에게만 마음을 열고 의지한다.


서로 헤어져서 지내는 '연인'으로 설정된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그런데 그 주인공의 주변에 친절과 호감을 베푸는 비중 있는 '이성'이 등장하는 영화,  대개 이런 영화는 99% 주인공이 기존 '애인'대신에 새로운 비중 있는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도 바바라에게는 근사한 서독 애인이 있고 둘은 너무도 서로 그리워하면서 멀리 떨어져 지내며 곧 탈출계획이 이루어지면 꿈에 그리는 재회를 할 날만 기다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바바라의 애인은 아주 가끔씩만 나오고 주로 바바라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안드레라는 호남형 의사의 이야기로 전개가 된다. 더구나 안드레는 바바라에게 꽤 관심과 친절을 보인다.  이 영화의 후반부를 짐작 못할 관객은 드물 것 같다.  이런 설정은 결국 '옮겨가는 사랑'이 결론이고 바바라와 안드레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바바라가 동독을 떠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럼 어떻게 그걸 동기 부여해야 할까?

 


'새로운 사랑 때문에 남는다'라는 것은 별 영화의 소재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나 명분은 꽤나 가치 있어야 하고 또는 '희생적'이어야 하고 어려운 결단이어야 한다.  단지 '새 애인이 생겨서 멀리 있는 애인을 배신한다'라는 이기적인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바라'는 결국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비중은 숨 막히는 동독의 삶을 탈출하려는 바바라의 심리와 병원에서의 의사로서의 중요한 의무와 삶, 그리고 동료 의사인 안드레의 관심과 따뜻함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스텔라라는 바바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약한 인물'을 등장시켜서 바바라에게 자신의 일에 대한 의무를 부각하고 있다. 별 배경음악도 없이 굉장히 건조하게 흐르는 영화인데 그런 만큼 구구절절한 군더더기도 굉장히 없는 영화다.  바라라의 탈출계획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파헤침도 아주 간략히 처리하고 있다.  탈출 계획을 앞둔 바바라의  하루하루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과  그때의 바바라나 안드레의 심리만을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날씬한 영화인 만큼 끝맺음도 굉장히 빠르다.  '이런 상황으로 처리되었다'라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바로 영화는 끝나버린다.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한다면서 영화 이야기로 다 채웠다. 2002년 프랑스에서 행복의 조건을  여론조사했는데 1위부터 4위까지는 다음과 같았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삶이 자신에게 베푼 것을 감사한다. 꿈을 갖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산다.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며 자신을 알아간다. 

바바라는 지옥 같은 동독의 현실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서독으로 탈출하는 대신에 동독에 남는다. 그녀가 선택한 행복의 조건은 위의 프랑스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행복의 조건은 결국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동독의 환경일 지라도 그녀가 그 안에서의 삶을 결정한 것은 그녀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놀라울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니나의 또 다른 출연작 <아노니마-베를린 여성>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물에 대한 연기다.  


131분 내내 폐허로 무너진 베를린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승승장구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이 난장판을 벌이며 기뻐하는 모습, 독일 여성들을 겁탈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담는다. 주인공은 “러시아군이 우리 건물에 밤낮으로 쳐들어왔다. 한 여자가 목을 맸고, 한 여자는 총에 맞아 죽었다. 무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차분한 어조로 독백한다. 처음에는 그런 지옥이 있을까 싶지만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도 적응하며 그냥 살아간다.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들 사이에서는 “몇 번 당했어?”, “네 번”, “너는?”이라는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정도다.

주인공은 기자 출신에다 러시아어도 하는 지식인 여성이다. ‘늑대 한 마리를 방패 삼아 다른 늑대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의도적으로 러시아군 장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로맨스로 발전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멜로드라마적 음악과 스토리 전개가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게 흠이다. 주인공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남편에게 그동안 기록했던 일기를 보여준다. 남편의 반응이 역시 나치 출신답다. “당신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 당신이 역겨워.”  


삶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역겨운 상황들만이 있을 뿐이다. 삶 자체가 역겨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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