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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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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Jan 26. 2022

나의 어린 부모

나는 언제쯤 당신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1973년 8월. 사연 보따리 풀어놓으면 아침 막장 드라마 60부작쯤은 거뜬히 나올 것 같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청춘들이 여자아이를 낳았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 부잣집 둘째 아들과 동대문 평화시장 고아 여공의 신데렐라 신드롬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부모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두 사람은 멀리 도망쳐 부여 어느 작은 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시어머니가 어린 며느리를 찾아와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 헤어지는 대가로 돈봉투를 들이미는 막장드라마로 이어졌다. 이 막장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딸자식 줄줄이~ 지지리 궁상, 짠내 진동 흥부전으로 장르 전환되었다.




궁극의 가난과 그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역경을 헤쳐나갔고,
굳건히 자수성가하여 딸자식 넷을
보란 듯이 잘 키워냈다.


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씨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제대로 삐뚤어진 어린 아빠. 불륜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이유로 부모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5살에 엄마를, 7살에 아빠를 여읜 어린 엄마는 고아였다. 작은집에 얹혀살며 식모살이를 하다가 배고픈 서러움이 싫어 무작적 상경해서 동대문 평화시장 여공이 되었다. 온기가 그리웠던 외롭고 외로운 두 존재가 만나서 너무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부모가 되었다. 자신들의 상처를 돌볼 여력도 없었던 어린 부모에게 자식 넷은 더 할 수 없는 짐이었으리라.


어린 아빠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딸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어린 엄마는 이웃들로부터 “아들이 없으니 남편이 집에 안 들어온다” 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시댁과 남편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 줄줄이 출산을 했다. 두 번의 낙태가 있었는데 또 딸인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어린 엄마는 네 번째 딸을 마지막으로 스물다섯에 출산을 종료하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 막내딸 출산과 같은 시기에 큰 집 아들이 태어났다. 덕분에 평생을 시어머니께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다.


'아들도 못 낳는 년'.



그 막장드라마의 안쓰러운 주인공 첫째 딸이 나다.

뱃속에서부터 우울과 불안을 탑재한 나의 DNA는 태어나서도 불안이 많았는지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면 밤마다 어린 엄마는 나를 들쳐 업고 밖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등에 업은 돌쟁이에게 새우깡을 손에 쥐어주고 꾸벅꾸벅 졸면서 영등포 시장을 걸어 다녔다. 시장을 돌다 집에 와서도 아이가 깰까 봐 눕지 못하고 장롱 이불 사이에 손을 끼워 넣고는 서서 졸았다고 한다. 잠도 많았던 어린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꼬... 어린 아빠는 곁에 없었다.



어린 엄마는 시어머니의 따가운 차별과 어린 남편의 부재를 모두 견뎌야 했다. 자식이 생기면 철이 들어 집으로 들어와 가장 노릇을 할 거라 기대했지만 어린 아빠는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이고 어쩌다 사흘 만에 들어올 때도 이유 없는 주먹질로 어린 엄마에게 분풀이를 해댔다. 매질이 무서운 어린 엄마는 돌쟁이 나를 남겨두고 친정 오빠 집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단다. 그럴 때마다 어린 아빠는 여지없이 찾아와 주먹질로 협박하며 어린 엄마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참. 바보 같다. 나를 놓고 도망쳤으니 찾으러 온 거다. 데리고 도망쳤으면 아마 찾아오지 않았을 것인데.



 그 뒤로도 어린 엄마는 이유 없는 폭력을 견뎌야 했고, 견딜 수 없을 땐 아이들을 두고 도망을 쳤다. 다시 돌아왔다 도망치기를 수차례. 네 아이들은 가정 폭력과 한 부모 가정을 넘나들며 부모보다 일찍 철이 들어갔다. 

어린 부모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내고 무림의 고수가 될 법도 한데, 쉰이 되던 해 1월에 결국 이혼도장을 찍었다. 


 





아이 넷의 부모가 되었던 그 해. 그들의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눈앞의 모든 현실이 버거웠을 스물다섯. 그 스물다섯의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나는, 철없던 어린 부모를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 무책임함을, 그 무지함을.

 


그 원망 때문에 지금까지도 부모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나를 본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해의 간극. 그 간극을 줄여보고자 전혀 애쓰지 않는 나. 그 이해 불가의 영역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부모. 


스물네 살, 독립한 이후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없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에게 내 속을 비친 적이 없다. 사는 게 팍팍해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며 S.O.S를 쳐도 내 부모는 나를 구조해줄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구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원에 버리지 않은 것에 깊은 감사를 하면서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 삶을 살게 되었다. 부모님을 몇 달 아니 몇 년을 안 보고 살아도 내 맘에는 그리움이 없었다. 그러마, 하고 맘먹은 것도 아닌데 '보고 싶고 애틋하고 의지하고 싶고' 뭐 그런 감정들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연로해진 부모님의 안부가 걱정되어 가까이 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의 거리는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이 평행선이 차라리 감사하다. 우리는 서로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서로를 찔러대는 고슴도치 같은 관계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이 없는 나의 부모는 당신들이 어떤 부모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언제나 나의 노력을 성에 차지 않아 했다. 부모에게 가 닿지 못한 내 마음은 상처로 돌아왔고, 다시는 먼저 손 내밀지 않으리라 또 한번 독한 맘을 먹게했다. 나는 또 어떠한가. 조금만 서운해도 가시 돋친 원망의 말들을 아프게 쏟아낸다. 그동안 쌓아 둔 마일리지를 한방에 캐시백 받으려는 듯, 사춘기 때도 하지 않던 짓거리를 쉰이 다된 나이에 한다. 우리는 서로 한걸음 더 멀어진다.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멈춰 선 채, 나는 또 버려진 내 마음을 주섬주섬 챙기며 상처받지 않을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의 노력은 서로의 살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내고 곪아 터질 때까지 끙끙 앓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시간이 갈수록 부모님과의 관계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공감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열아홉에 부모가 된 그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에 공감해야 하고, 도망치고만 싶었을 그 철없는 청춘들의 두려움에 공감해야 한다. 생을 놓아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고, 보육원에 보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도 안다. 이해가 아니라 진심으로 공감해야만 비로소 내 안의 원망을 지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지금은 그리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알고 있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지구와 명왕성만큼이나 멀다. 




언제쯤
그 어린 부모의 삶을
진심으로 품어 줄 수 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냐고,
 
사느라 참 애썼다고,

언제쯤
와락, 안아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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