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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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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Feb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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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명절에 모이지 말까?



올해는 더 추웠던 설 명절이었다.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번 설에는 유난히 등도 시리고 코끝도 차갑다. 어머님이 사다주신 덧신을 신고 있어도 등에 와닿는 북풍의 온도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나이 탓인지. 


쉰이 넘은 며느리 둘이 다섯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 전을 부치다 보니 10분 간격으로 '아이고아이고' 소리가 터져 나온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허리와 무릎관절에서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칠순이 훨씬 넘으신 시어머니는 쉬지도 않고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시며 찬물에 손을 담가 음식을 준비하신다. 오래된 식당 건물이라 주방 뒷문에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와서 손이 더 시리다. 시어머니는 한번 앉았다 일어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노후한 관절이 작년과는 다른 시어머니의 상태를 말해준다. 손가락 마디마디 곱아진 류마티스는 이제 식당 일을 그만 하셔야 한다고 눈물 짓는다.


이씨 집안 조상들을 위한 차례 음식인데 이씨 자손들은 명절에 일을 하지 않는다. 큰 아들은 티비앞에, 막내 아들은 그의 아들을 실내 놀이터에 맡기고 아이를 기다리며 조용한 카페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그나마 명절 때 일을 잘 도와주던 둘째 아들도 이번 설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의 집 귀한 딸들 셋만 추운데서 도가니 두드려가며 고생을 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일 년에 두 번 뿐인 명절이니 힘들다 생각 말고 참아보자,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그래도 자식들과 한 상 차려 먹고 바리바리 싸서 보낼 생각에 시어머니는 일을 멈추시지 않는다. 


우리 시어머니 명절 음식으로 말씀드릴것 같으면, 자식들이 드리는 명절 용돈으로는 턱도 없는 비용이 들어가는 음식 장만이다. 소 한 마리 잡아서 부위별로 냉동시켰다가 '이 눔은 구워 먹거라, 이 눔은 국 끓여 먹거라' 하시며 돌아가는 길에 들려 보내신다. 각종 유기농 고추장, 된장,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며 김치들. 차 트렁크가 미어터질 지경이다. 혼자 계신 나의 친정아버지 식사까지 챙기시며 전이며 게장 무침, 장조림, 과일에 떡국 육수까지 챙겨주신다. 


집으로 돌아와 친정아버지와 푸짐하게 차려 먹고는 시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전화로 인사를 드렸다. 


"뭣이 감사 허냐, 더 못해줘서 탈이지..."


항상 이렇게 대답해 주시는 어머님. 


내가 이뻐서가 아니라, 당신 아들이 며느리한테 대우 받고 살으라고 이토록 며느리들에게 친절하시다는걸 알고 있다. 그래도 친정엄마에게 김치 한번 얻어 먹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설령 계산된 친절이라 할지라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지혜로운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남편이 부럽다. 자식들에게 받는 것이 너무 당연한 우리 부모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시어머니를 보면서, 장성한 자식에게도 한도 끝도 없이 주고 싶은 마음, 집에서나 처가에서나 기죽지 말고 당당했으면 하는 마음...... 이런 게 부모 마음인가,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명절 당일에 차례를 지내고, 트렁크 한가득 싣고 친정으로 갔다. 동생네가 준비해온 음식과 시어머니가 챙겨주신 음식으로 푸짐하게 상이 차려졌다. 


빈말이라도 


'시댁에서 음식 하느라 고생 많았다'

'음식 보내주셔서 느이 시어머니께 고맙다' 


라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동그랑땡이 퍽퍽하다, 고기가 질기다 불평하시는 아버지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작년 추석에도 그러시더니 올 설에도 여전하시다. 


막내 동생네는 명절 전에 다녀갔고, 셋째는 외국에 있어서 명절 당일엔 둘째 동생네 식구들과 우리 가족만 모였다. 모두 8명. 평상시에 혼자 조용히 계시던 아버지 입장에서는 북적거리는 게 불편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남자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에 많이 힘들어하셨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어찌 점심과 저녁까지 차려먹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다음 명절에는 안 오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나도 이럴진대, 사위들이라고 그런 말과 표정을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내내 민망함이 떠나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나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줄 몰랐다. 받아본 게 없으니 베풀 줄도 몰랐다. 산짐승이 새끼를 낳아 본능으로 젖을 먹이듯 어찌어찌 키워냈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양육하고 사랑을 주는 법은 몰랐다. 희생은 더더욱 몰랐다. 궁지에 몰리면 자식도 버리고 도망쳤다. 지금까지도 자식의 어려움보다 당신들의 처지가 우선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평생을 자신들의 인생을 한탄하며 측은해하느라 자식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일찍 철든 딸들이 없는 형편에 부모를 봉양하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나의 부모님은 딸들의 그 작은 노력마저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공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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