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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Oct 20. 2021

아이 낳으면 이민 갈 거야

사교육이 무서운 18년 입시학원 강사의 딜레마

초등학교 교사 & 입시학원 강사 부부


2012년 겨울.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서 반쯤 취해 나는 선언했다..


"임신하는 즉시, 이민 절차 밟을 거야.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아마도 임신 계획이 없던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호기로운 선언이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강사였고, 남편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퇴근 후 학원에서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남편과 나누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그래서 사교육을 없애야 돼!"라고 했고,


나는

"나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사교육에 염증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공교육이 제대로 돌아가면 사교육이 이렇게 판을 치겠냐?"라고 했다.

 

남편 입장에서 사교육은 돈 밝히는 속물 집단이었고, 내 입장에서 공교육은 무능한 권위주의 집단이었다.

우리 둘의 대화는 번번이 각자의 직업을 비난하는 공격적인 말싸움으로 끝나곤 했다.


이랬던 우리 부부가 대선 결과 앞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가 만약 아이를 낳는다면 이 땅을 떠나자고.

두 사람 모두 누구보다 교육 현장에서 매일매일 현실적인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이번 정권교체로 예측되는 교육 판도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그랬다.  




입시학원 강사인 내가 사교육 현실이 안타까운 아이러니


나는 18년 경력의 입시학원 강사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졸업 후에 자연스럽게 생업으로 이어졌다. 30대 후반이 되어서는 작은 학원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18년 동안 남들 잘 때, 놀 때, 쉴 때 일했다. 저녁이 없는 삶, 주말이 없는 삶을 18년 동안 살면서 점점 회의가 들었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며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우리나라에서 하루빨리 사교육이 없어졌으면 좋겠다'였다.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돈을 버는 게 맞나 싶어서.


나는 주로 중,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사회/역사 과목을 가르쳤다. 1990년대 후반, 그 당시 지방 입시 학원은 서울의 유명 입시학원의 이름을 딴 대형 학원들이 주류였다. 유명 강사일수록 한 강의실에 100명~ 200명 학생들을 모아 놓고 마이크 수업을 하던 때였다.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불합리한 시스템이었다. 졸업 직후부터 30대 중반까지 학원강사로 일하며 열심히 재주를 부려 남의 주머니를 불려 줬고, 그러는 사이 나는 베테랑이 되었다. 더 이상 내 노동력의 대가를 불합리한 시스템에 빼앗기기 싫었다.


서른여섯 살 가을, 족집게로 소문난 강사들과 의기투합하여 소규모 그룹과외를 표방하는 작은 학원을 오픈했다. 그야말로 자신감 뿜 뿜  '입시 드림팀 어벤저스'였다. 그 당시 우리 동네 학원계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지방 소도시였지만 교육열 높은 '사' 짜 부모들(의사, 변호사, 교사, 대표이사 등)이 밀집된 지역이었고, 입시 코디네이터가 있는 나름 지방의 대치동이요, 스카이캐슬이었다. 넘치는 열정만큼 성과도 이루었고, 명문대 합격률이 높아질수록 즐겨 마시는 와인의 가격대가 올라갔다.


승승장구의 시간은 짧았다. 우리 학원과 같은 소규모 그룹과외 형태의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경쟁은 치열해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정책이 널을 뛰었고 부모들은 혼돈 속에서 아이들을 이학원 저 학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마흔둘 늦은 나이에 어렵사리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다.



나이를 먹어서인가, 부모가 되어서인가.  아이들의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평일에 혹시라도 다른 스케줄이 생겨서 수업을 빠지거나, 시험기간이 다가올 때면 보강 스케줄을 잡게 되는데, 이 아이들의 시간표를 보면 미안해서 도저히 수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시간이 없어서 못 잡는 거였다. 이제 막 중학교 입학한 아이의 주말 스케줄에 단 한 시간도 비는 시간이 없다. 한두 시간 비는 공간이 보이더라도 차마 '이 시간에 와'  할 수가 없다. 평일에는 국, 영 수 위주로, 주말에는 과학, 사회, 예체능, 중국어 까지. 너무 바빠서 아이들과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그런 아이들이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묻는다. 힘들지 않냐고.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가 대답했다.  


"가끔 그렇게 묻는 어른들이 있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건데 왜 힘드냐고 물어요?"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의 눈빛에는 아무런 열정도 설렘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부모가 설계한 대로 살아온 삶. 여기 가라면 가는 거고, 저기 가라면 가는 거고, 붓글씨 쓰라면 쓰고, 춤추라면 춤추고, 악기 잡으라면 잡으면서 살아온 아이들.


힘들지 않을까... 는 나의 생각일 뿐이다. 어린 시절 맘껏 뛰놀고, 사춘기 시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센티멘탈에도 빠져보고, 김소월의 시를 외우고, 친구네 집에서 떡볶이 먹으며 이상은의 담다디 춤을 추고, 짝사랑했던 교생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밤새 썼다 지웠다 해본 추억이 있는 내 눈에만 안쓰러운 거다.


태어날 때부터 문화센터, 학습지, 수백만 원에 이르는 교구로 다져졌고, 유치원 때 이미 엄마가 스케줄 관리하며 웬만한 공부방과 피아노 바이올린 학원으로 빡빡한 일정을 거뜬히 소화해 내는 내공 있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익숙한 삶일 뿐이었다.






부모의 바람대로 전부 명문대에 들어갔을까?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고, 영화 한 편 맘 놓고 볼 수 없이 엄마의 셔틀로 학창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전부 명문대에 들어갔을까?  


20프로 정도는 명문대에 들어간다. 40프로는 인 서울로 나름 선방한다. 나머지 40프로는 지방대에 가거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기도 한다. 지방 소규모 학원 입장에서 나쁜 성과는 아니지만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돈을 들였는데"


하며 허무해질 법한 결과들이다.


학원비를 받을 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든다. 고액의 학원비를 받으면서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아이가 있고, 받은 돈 그대로 쥐어 주며 "고생하시는 부모님 맛있는 것 사드려라" 하고 싶은 아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상위권 학생이고 본인의 진로도 다 정해져 있고, 수업시간에 긴 설명도 필요 없다. 그 아이가 궁금한 점들에 대해서만 대답해주면 된다. 질문의 난도가 높아서 학생의 만족도 역시 높아진다. 상위권 학생일수록 선생의 설명이 길면 지루해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마지못해 학원에 나와서 열심을 다 해 보려 하지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경우이다. 선생인 내가 붙잡고 잡들이를 한다고 한들 학원비만 아깝다. 내가 보기에 이런 아이들은 본인의 욕망을 잘 안다. 하고 싶은 직업도 구체적이고 계획도 다 있다. 외국의 어느 학교에 가야 하는지, 어떤 시험을 봐야 하는지, 어떤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하는지.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한가.


내가 수업할 때 보다 본인의 꿈을 이야기할 때 더 생기가 돌고 눈빛이 더 반짝거린다. 한데, 대학까지는 부모님 뜻을 따라보려 한단다. 이 무슨 시간 낭비인가. 그래도 나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터놓으며 속내를 드러내는 이 아이들이, 언젠가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문제는 명문대에 들어갔던 상위권 학생들이 뒤늦게 진로상담을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 현타가 온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꿈이 뭔지,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등 청소년기에 했을 법한 고민들을 안고 대학생이 되어 찾아오는 것이다. 대학에 가니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 보고 싶어서 수능을 한번 더 치고 싶다는 아이도 있고,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도대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도 있다.


뒤늦게 본인의 진짜 욕망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부모님의 욕망으로 살던 아이들이기에 갑자기 찾아온 정체성의 질문들로 삶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1~2년으로 대학 생활을 끝내고 훌쩍 해외로 여행을 다니다 이탈리아에 정착한 친구도 있었고, 의대를 갔던 학생이 신학대학으로 다시 입학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내가 본 사교육 현실이었다. 많은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라는 타인의 욕망에 끌려다니며 그것이 내 것인지 부모 것인지 구분도 못하는 삶을 살다가 뒤늦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경우가 있다. 뒤늦게 라도 가면 다행인데 끝까지 타인의 욕망에 봉사하다 인생을 끝내는 사람도 있다.


부모들은 또 어떠한가? 혹여나 내 아이 뒤쳐질세라 남들 하는 거 다해줘야 노력하는 부모 소리 듣는다. 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힘들게 맞벌이하며 본인들 옷 한 벌 제대로 된 거 사입지도 못하고 삶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갈아 넣는다. 그런 부모님들과 상담을 할 때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이들도 부모님들도 자기의 인생을 살게 해 주시라고. 





엄마가 되어 사교육을 생각하다.


2014년 9월. 마흔둘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 없이 내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만 하던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수능이 2달도 남지 않았고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손목 보호대를 한채 산후조리원을  빠져나와 수업을 하고, 다시 조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쏟아졌다. 입시가 코앞이라 산후조리도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지만, 공교육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후조리 중인 사교육 선생에게 성적을 의지해야만 하는 이런 교육 현실이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울 수나 있을까? 학원 안 다니면 같이 놀 친구도 없는 세상인데.


산후조리원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생후 5일 된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오며 출산 전 호기롭게 외쳤던 다짐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아이를 낳으면, 이민 갈 거야!"


과연 이 다짐의 메아리는 어느 쪽에서 들려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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