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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Oct 20. 2021

어서 와, 공교육은 처음이지?

부디, 슬기로운 학교 생활이 되기를.

날아든 취학 통지서.


진심, 아이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사업적 목표를 달성하고 아이와 함께 해외로 나가고 싶었다. 아이는 유학을, 나는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내 인생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그리 허용적인 적이 없었다.



생각만큼 사업의 성과가 달성되지 못했고, 아이가 7살 되던 2020년 1월에는 우리나라에도 코로나가 덮쳤다. 4월에는 내가 사고를 당해 수술을 해야 했고, 일도 접은 채 요양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고 내 마음의 상처까지 돌보느라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코로나 시국, 수술과 입원, 사업상의 당면 과제들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2020년 12월. 취학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참 묘했다. 가슴 벅차게 뿌듯한 건 아닌데 벌써 이만큼 컸나 싶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제도 교육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건가, 나와 아이의 선택은 이것뿐인가 하며 답답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아이가 다녀야 할 학교는 행정구역 상 면 단위의 시골학교라서 타 지역 아이들이 주소지를 옮기면서까지 다니고 싶어 하는 학교였다. 학습이 아니라 놀이와 예체능 중심으로 특화되었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학습지 한번 제대로 풀어 본 적 없는 아이라서,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 학습위주의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싶어 우려하던 차에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일단은 학교를 다녀 보기로 했다.



드디어 초등학교 입학!!!

존재 그대로를 인정받고 사랑받았던 좋은 시절 다 끝나고, 용감무쌍하게 제도권 안으로 들어갔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 안으로.



좋아하는 만화영화  때를 제외하고는 책상에 10 이상 앉아 있어   없었던 아들은......


우려했던 대로,


입학 3 만에 문제아 판정을 받았고 매일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1학년이라 담임 선생님이 매일 전화를 하나 보다 했다. 매우 꼼꼼하고 세심하신 분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근데 점점 느낌이 ~~~ 해졌다. 같은  친구 엄마에게 물었다. 담임 선생님께 매일 전화가 오는지.  번도  왔단다. 아니 이뤈...


우리 아들..... 벌써 선생님께 심히 사랑받는 학생이 되었나 보다 ㅠㅠ



입학 3일째 날. 매일 그날의 활동을 사진과 함께 학급 밴드에 올려 주시는데 그날은 사진을 보고 뜨악했다. 아이가 제 책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맨 앞 담임선생님 책상 앞으로 불려 앉혀졌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움직임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날 저녁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앞자리에 따로 불러 앉힌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림을 그릴 때 색칠이 선 밖으로 나가요."


"색연필 쓰고 정리를 안 해요."


"연필과 지우개를 자꾸 떨어뜨려요."


"쉬는 시간에 시장놀이를 해요."


"사물함 정리 정돈이 안 돼요."


"수업시간에 자꾸 움직여요."


"친구들과 장난이 심해요."


"어머님께서 집에서 잘 가르쳐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방에서 쭈그려 앉아 한참을 듣고 있던 나는 목구멍까지 쳐 올라오는 질문들을 꾹꾹 눌러 가라 앉히며 대답했다.


"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3개월도 아니고, 3일 학교 생활에서 아이는 얼마나 완벽해져야 했을까?



퇴근  집에  남편에게 당장 따져 물으며 하소연하고 싶었다. 내가, 그리고 이제  입학한 우리 아들이 잘못된 거냐고!


하지만 전직 교사였던 남편은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해석이 관대했으므로, 이번에도 남편이 선생님을 감싸고돌며  탓을 하면 너무 상처 받을  같아서 속으로 삼켰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학급 밴드에 올라온 사진을 보여주며 선생님과의 통화 내용을 말해주었다. 사진을 보던 남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학 3일 만에 반 친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상황이, 전직 교사였던 남편에게는 누구보다 생생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선생님의 엄한 호통 소리, 반복적으로 불러 대는 아이의 이름, 아이에게 쏠리는 반 친구들의 시선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이름표가 붙여진다.


 '문. 제. 아'


다음 날,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는 3년 동안 천둥벌거숭이처럼 산에서 자란 아이의 성장 배경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부탁했다. 특별하게 자란 아이니 특별하게 대우해달라는 것이 절대 아니라, 낯선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십사 하고.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있었던 지난 4일 동안 발견해 내신 아이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남편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선생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문제가 있습니다"


심장이 요동치고 눈물이 쏟아졌다.



"입학한 지 3일째~ 왜 저런 게 문제아인 거지? 겨우 3일 지났잖아?? 적응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가 없던 시절 본연의 나였다면,  18년 경력 논술 선생 소환하여 쌈닭 모드 켜지며 절대 지지 않을 말발로

그 상황을 제압했을 수도 있겠으나......



하늘 같은 스승님께 그러면 아니 되었다. 급 죄인 모드 들어가며 자책했다.

입학 전에 미리 해놨어야 할 초등 리허설을 제대로 못한 이 못난 어미 잘못이라고.

자식 맡긴 어미는 약자이니까!



담임선생님과 상담 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애초부터 공교육에 큰 욕심 없었는데 그냥 홈스쿨로 전향할까?"


"아냐, 아이도 공교육 경험을 해 봐야 나중에 스스로 홈스쿨링을 선택할 수 있을 거야"


"아니지, 아이들 각자의 특성과 개성이 공익과 질서유지라는 미명 하에 틀에 가두어지고, 그 색을 잃게 만들 수 없지."


"아냐 , 그래도 공교육의 장점도 분명 있을 거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생각이 널을 뛰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달라진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야생마처럼 산에서 뛰놀던 아이를 책상에 40분씩 앉혀 놓았기 때문이라고.




3월 4월 두 달 동안 집과 학교에서 단체생활에 필요한 규칙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물론 유치원 때에도 안 가르친 건 절대 아니었지만, 더 강하게 훈육했다. 자유분방한 숲 생활에 비해 규칙과 질서가 우선인 학교생활이 힘들 법도 한데 아들이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었다.



맨날 혼나면서도 학교 가는걸 너무 좋아해서 단 한 번의 지각도 결석도 없이 학교에 잘 나갔다. 입학 초기에는 등교거부 증상도 많다는데, 우리 아들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었다. 날마다 지적받고 혼나고 돌아오는 아이가 힘들다고 가기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학교생활이 재밌다고 해서 의외였다. 가끔은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표정이 어두워서 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런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표현과는 다르게 담임선생님은 굉장히 힘들어하셨다. 입학할 때 보다 많이 좋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산만하고 통제가 잘 안돼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투에서 아들로 인한 피로감이 진하게 느껴졌다.



아이니까, 아직 입학한 지 한 달도 안되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하다 보면 내가 너무 죄지은 것 같고 우리 아이가 진짜 문제가 있나 싶고 심경이 복잡해져만 갔다.


만 6년 6개월 인생 우리 아들.  처음 시작하는 사회의 울타리 "공교육".


엄마와 너는 슬기로운 학교 생활을  해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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