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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Jarrett [At The Deer Head Inn]

by 최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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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쓰 자렛은 2018년 뇌졸중으로 한 팔이 마비되어 정상적인 연주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참으로 복잡한 생각에 잠겼었다. 음악의 신은 어째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몰아준 다음, 노년에 이른 뒤에 갑자기 그걸 다 빼앗아 버리는 걸까, 어떤 사람이 저런 삶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면서. 한참 지나 유튜버 릭 비아토의 채널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니 얼마 전까지 창창하던 눈이 빛을 잃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때때로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던 그의 눈빛과 말투가 사라져 버렸다.


릭의 인터뷰는 언제나처럼 훌륭했지만, 보는 내내 슬펐다.



최근에 [The Old Country(Live at the Deer Head Inn)]이라는 트리오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사실 [At The Deer Head Inn]이라는 음반이 진작에 나와있었다. 그 당시의 녹음 중에 미발매되었던 곡들로 음반이 나온다고 하니, 원래 발표되었던 음반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한 그저 그런 연주인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30년 정도나 묵혀두었던 음악이면 그런 생각을 해볼 만하지 않나([At The Deer Head Inn]은 1992년에 녹음되어 1994년에 나왔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주 멋진 음반이었다. 생각해 보면 키쓰 자렛, 게리 피콕, 폴 모션이 스탠더드 곡들을 연주하는데 그걸 미심쩍어한다면 내가 비뚤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음악의 신 같은 이들인 데다가 게리 피콕은 게리 피콕 대로, 폴 모션은 폴 모션대로 키쓰 자렛과 오랜 시간 같이 연주를 했었다. 폴 모션이 잭 디조넷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는 일회적인 세션이라고 대충 넘겨짚지 않았어야 했다.


제법 유명한 스탠더드 곡인데도 최근에야 연습하고 연주하기 시작한 콜 포터의 곡, <Everything I Love>로 음반은 시작한다. 사실 이 곡은 키쓰 자렛의 초기 음반, [Life Between the Exit Signs]에서도 들었는데, 베이스는 찰리 헤이든이 맡았다. 드럼은 두 음반 모두 폴 모션이 연주하고 있다. 이 버전을 제법 많이 들은 탓에 나도 모르게 두 버전을 비교해서 듣게 된다. 같은 곡을 연주하는 같은 피아니스트와 드러머이니까. 달라진 건 베이스 주자, 그리고 제법 긴 시간이 남긴 수많은 것들이다.


1967년에 연주한 <Everything I Love>


1992년에 연주한 <Everything I Love>


1967년의 연주가 훨씬 추상적이고 분방하게 들린다. 찰리 헤이든의 영향이 분명한데, 아무래도 베이스 연주에 귀가 좀 더 끌려가기 마련인 나는 코드 진행조차 쉽게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여러 번 들었어도 곡이 마음에 잘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이 곡을 연습하기로 마음먹고는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시점에 의식적으로 베이스 연주를 걸러내고 피아노와 드럼 연주만 집중해서 들어보기로 했더니 생각보다 꽤 명확한 연주였다.


그에 비해 1992년의 게리 피콕은 찰리 헤이든보다 훨씬 코드 진행을 명확하게 담아내고, 구체적인 4분 음표의 연속을 들려주었다. 그러니 트리오 전체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들린다. 물론 젊은 시절의 키쓰 자렛 쪽은 리듬과 프레이즈의 면에서 조금 더 흐드러지듯 하게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고, 스탠더드 트리오 시절에는 제법 리듬과 타임 안쪽으로 들어와 연주하는 식으로 변했다. 그 차이도 분명 두 곡의 이미지가 크게 다른 모양을 갖게 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전히 자유롭게 상상하지만(셋 다 프리 재즈에 깊이 관여한 인물들이다), 단정한 느낌이 적당히 더해져서 듣기에 난해한 느낌이 없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곡목은 키쓰 자렛이 스탠더드 트리오로 여러 번 반복해 연주해 온 곡들이다. <I Fall in Love Too Easily>, <All of You>, <Someday My Prince Will Come>, <Golden Earrings>,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등 모든 곡들이 스탠더드 트리오의 연주로 친숙한 곡들이다.


키쓰 자렛은 악기를 다루는 능력이 재즈 역사상 드물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인데, 정작 솔로를 할 때면 끝없이 단선율로 관악기와 같은 멜로디를 끌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긴 솔로 프레이즈 뒤에는 왼손 컴핑조차 쉬고 있을 때가 많다. 그의 트리오가 더 열린 소리를 갖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나직한 템포로 <The Old Country>의 솔로 첫 한두 코러스를 풀어나가는 것을 들어보면 심플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큰 욕심부리지 않고 이야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잘 드러난다.


[Standards Live]나 [Still Live], [Keith Jarrett at the Blue Note] 등 스탠더드 트리오의 음반을 꾸준히 듣다 보면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가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곡들이 겹친다. 어쩌면 이건 마일스 데이비스도 마찬가지였는데, 1960년대에 웨인 쇼터, 허비 행콕, 론 카터, 토니 윌리암스로 구성된 최고의 밴드를 거느리고는 비슷비슷한 과거의 레퍼토리를 반복하곤 했었다. 스튜디오에서는 웨인 쇼터의 곡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곡들을 꾸준히 녹음하고는 정작 공연장에서는 <Autumn Leaves>며 <So What>을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곡을 대하는 태도가 지금의 우리와는 조금 다른 것일까.


원래의 음반, [At the Deer Head Inn]은 어땠는지 다시 들어보고 싶어졌다.


Chandra (J. Byard)


긴 솔로 피아노 인트로로 시작하는 <Solar>를 처음 들은건,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DJ가 "...여전한 키쓰 자렛의 연주입니다."하며 소개했을 때였다. 사실 그는 프로그레시브 록, 혹은 아트 록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소개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너무도 덤덤하게 키쓰 자렛의 연주를 방송에서 틀어주는게 작은 충격이었다. 심지어 재즈 팬이라고 자부하던 나는 잘 모르던 음반이었다.


이 음반의 세 번째 트랙인 <Chandra>는 특히 산뜻한 느낌이라 당시부터 지금까지 무척 좋아하면서 듣는 곡이다. 다만 키쓰 자렛은 물론 다른 재즈 음반 어디에서도 다른 버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검색을 통해 원곡을 들어보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의 곡이라는 것만 유심히 보았다면 간단하게 찾아볼 수 있었을텐데. 12마디의 블루스 형식 위에다 기분좋은 멜로디(그다지 블루지하지는 않은)를 얹어둔 곡이다.


키쓰 자렛은 명확하게 모티브를 발전시켜가며 블루스 솔로를 몇 코러스 정도 끌고 나간다. 그러다가 솔로가 점점 발전해나가면서는 제맘대로 주어진 화성을 드나들며 연주를 하고 있어서 명확한 블루스 형식으로 들리지는 않는 단계까지 이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라가야 형식이 느껴진다. 그러니 곡의 도입부가 주는 인상과 솔로가 마칠때쯤의 느낌은 꽤나 다르다. 드럼 트레이드까지 끝나고 헤드 아웃, 전형적인 방식으로 구성한 연주를 대충 끝내는 엔딩에서 적당히 맞고 적당히 틀려가는 느낌이라 서로 기분좋게 웃는 소리까지 다 담겨 있다.


ECM에는 아직 발매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음악이 쌓여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여전히 그의 연주를 듣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 제법 많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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