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공연을 마치고는 '클럽에서의 연주가 주업인 재즈뮤지션이라 멋진 공연장에서의 가수 공연은 늘 적지 않은 흔적을 마음에 남긴다....' 하며 인스타그램에 글을 남겼었다. 일상이 아니라 곧 깨어날 것이 정해져 있는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윤아의 정규 5집 <관능소설官能小説>의 음반 활동은 확연히 길고 활발했다.
김윤아는 자우림으로서의 활동이 본업이고 몇 년에 한 번씩 솔로 음반을 내는데, 솔로 음반을 중심으로 한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곡을 쓰고 편곡 작업을 하면서 녹음을 진행하는 과정은 일반 청중에게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외부로 노출되는 시간은 더 짧아 보인다. 몇 달간 주요 음악 방송에 출연하고, 잘 준비된 공연을 한 번 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 시기에 맞춰 페스티벌에 섭외가 되기도 하는 정도. 만 일 년 동안 꾸준히 솔로 음반 활동을 한 건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다.
내가 처음 김윤아의 솔로 공연에 참여하게 된 건 2006년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5년 연말, 어쩌다 보니 제법 큰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세 가수 -박효신, 김조한, 박정현이었다-의 합동 공연이다 보니 각자 자신의 밴드를 거느린 대형 가수들이었지만 딱히 한 사람의 밴드를 쓰지 못하고 세션을 끌어모으다시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공연의 편곡자를 통해 유입된 케이스였고. 그때 나의 연주를 좋게 본 동료 연주자의 소개를 통해 그다음 해의 김윤아 솔로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처음 서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라, 이러저러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전화를 받고는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공연을 한다는 정도로 지나쳤었다.
몇 년이었을까, 시간이 꽤 흐르고는 또 김윤아의 공연이 잡히고, 몇 개의 방송 스케줄을 함께했었다. 그리고는 또 몇 년 만에 연락이 오는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나는 재즈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지속하면서, 이러저러한 세션을 하며 지내다 보면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음반의 몇몇 곡도 녹음하게 되고, 공연 실황도 라이브 음반으로 발매가 되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세션에서 어느새 밴드 멤버로 나 스스로도, 가수도, 기획사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드문드문 이어진 관계에 어느새 이십 년 정도의 시간이 쌓였다.
이번 공연은 작년의 음반 발매 공연과 같은 장소, LG 아트센터 마곡이었다. 여러 면에서 훌륭한 공연장이라 그것만으로도 살짝 설레고 긴장되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작년에 한 번 경험한 공연장이라 이번에는 딱히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공연 전날의 리허설부터 자연스럽게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원래 첫날 공연은 살짝 긴장감이 돌고, 그게 지나고 나야 뭔가가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솔로 공연과 여러 페스티벌, 방송 및 행사까지 많은 무대를 함께 섰던 밴드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몇 번의 합주를 추가로 거쳤으니 제법 탄탄한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십여 년, 거의 이십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이 밴드에서 나는 막내로 출발해 제일 형님이 되었다. 그동안 한 명씩, 한 명씩 멤버들은 들고 나기를 반복했는데, 지금의 멤버들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고 있다. 이 멤버들을 염두에 둔 곡과 편곡이 쌓여가고 있다.
나는 더블베이스와 일렉트릭 베이스를 연주하는데, 두 악기를 고르게 잘 연주하고 싶었다. 보통 재즈 연주자들은 더블베이스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일렉트릭 베이스를 들고 가요나 팝 스타일을 연주하면 뭔가 세밀하고 정확한 연주가 잘 되지 않거나 깔끔하게 정제된 내용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재미없어하는 경우가 많다. 세션 연주를 별로 할 일이 없는 시절에도 일렉트릭 베이스를 꾸준히 연습해 왔는데(어쩌면 더블베이스보다도 더 많이), 이 공연처럼 정말 두 악기의 비중이 반반인 상황에 나도 모르게 대비해 온 셈이다.
어쩌다 보니 이번 공연에는 베이스 솔로가 담긴 곡들이 죄다 들어가 버렸다. 더블 베이스로 인트로를 연주하고는 보컬과 호흡을 맞춰 유니즌으로 합을 맞춰야 하는 <세상의 끝>, 프렛리스 베이스 솔로가 있는 <독>, 트로트가 섞여든 일본풍의 스윙 곡에 간주를 담당해야 하는 <체취>, 그리고 땅이 꺼질듯한 정서를 거의 전적으로 담아내야 하는 <행복을 바라는 게 잘못인가요>까지 한 공연에 다 포함된 건 아마 처음이지 싶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본 지인은 대뜸 "베이스 비중이 큰 공연이네요" 하고 말했다. 몇몇 곡은 베이스 연주가 없어 쉬어가기까지 했지만, 주변은 온통 컴컴한데 내 머리 위로만 조명이 떨어지는 연출이 몇 번 있었으니 제법 주목을 끌 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공연은 <관능소설官能小説> 활동을 마치는 공연이었다. 이제 여기까지, 하고는 본업인 자우림 활동으로 돌아가는 이정표다. 다음 달에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단독공연의 무게감과는 다른 면이 있다. 멤버들 중 대부분은 자우림의 공연에도 세션으로 참여하는데, 내 경우는 다르다. 곧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무대 위에서 ".... 이 공연은 저에게 있어 '매듭'과도 같은 공연입니다. 이제 저는 제 집과도 같은 자우림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는 멘트를 들으며 나는 closure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게 있어 또 하나의 시기가 닫혀가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꿈같은 여행을 다녔으니 이제 두 발에 힘을 실어 땅을 딛고는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