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arky Puppy
오랜만에 이 동영상을 찾아보니 어느새 조회수는 3694만 회에 댓글이 2만 개가 넘는다. 요즘 시대에 가사가 없는 연주곡으로 이런 인기를 얻는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게다가 구독자가 많은 채널에 출연해서 쌓인 조회수가 아니라 구독자는 40만이 채 안 되는 해당 레이블의 채널에서 유독 이 곡만 이렇게 주목을 받으려면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일단 새로워야겠지만 그렇다고 대중의 정서와 멀어져서는 안 된다. 시대의 열망을 딱 한 걸음 정도 앞에서 이끌어갔을 때 가능한 일이다.
스나키 퍼피,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마이클 리그와는 인연이 깊은 편이다. 일이 년 정도 학교 생활을 같이 했었는데, 수많은 학교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약간 조심스러웠는데, 그를 알고 지내는 많은 이들이 다들 친분을 과시하면서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고 어필하려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과도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마이크와의 인연이 그랬다.
스나키 퍼피가 스쿨 밴드이던 시절을 기억한다. 대략 2004년 언저리였을텐데, 이런저런 친구들이 모여서 몇 번 합주를 하더니 J&J's Pizza라는 곳의 지하에서 연주를 한다고 강의실의 문에 전단지를 만들어 붙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 강아지 얼굴 모양 말이다. 내가 주인마님으로 모시는 분이 그 밴드의 키보드 연주자였기에 88 건반 키보드를 차에 싣고 지하로 옮겼던 것, 그리고 바 뒤편에 서서 음악을 들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나키 퍼피는 Uncommon Ground라는 학교 뒤편의 카페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면서 녹음을 했었다. 그때에는 날라야 하는 악기가 Fender Rhodes였다. 그 악기를 들어 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무거운지를. 그때의 라이브 실황 녹음은 정식으로 발매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00년대 초반은 데모 CD를 컴퓨터로 구워서 이곳저곳에 뿌리거나 하던 시절이었는데, 다행히 집에 한 장의 CD가 남아 있다. Reddit에서는 이 음반을 구하려는 이들이 좀 있었다.
마님께서 이제 막 시작한 밴드를 떠나게 된 건 이제는 고인이 된 메이너드 퍼거슨의 밴드에 우리 둘이 같이 합류하게 된 것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스나키 퍼피는 친구들끼리 즐겁게 연주하는 밴드였던 것에 비해, 메이너드는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 같은 사람이었다. 스타일이 그다지 세련된 편은 아니었지만, 누가 뭐래도 트럼펫 연주에 있어서는 전무후무한 인물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들어봐도 그의 고음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소리를 낸다.
재즈를 전공한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붕 뜬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프리랜서 뮤지션의 삶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름 이름 있는 연주자의 투어 밴드 멤버로, 그것도 결혼한 부부가 동시에 고용이 되는 것은 적지 않은 행운이 따른 것이었다. 주변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살던 집을 정리했다. 몇 년 탄 자동차며 피아노, 가구 따위를 헐값에 내다 팔고, 한국으로 짐을 부쳤다. 학교를 다닐 동안 생활비를 책임져준 호텔과 교회의 연주를 그만두고, 수트케이스 두 개와 베이스만 챙겨서는 투어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미국의 각 지역을 다 돌아다니는 몇 차례의 연주 일정을 소화해 냈다. 한 번의 투어는 보통 두 달 동안 지속되었는데, 미국의 서부에서 출발해서 전역을 횡단하고는 동부에서 마치는 식이었다. 엘에이나 샌디에이고 같은 큰 도시만 거치는 것이 아니라 애리조나의 투싼, 혹은 파고 같은 작은 도시까지 동선에 맞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공연을 하는 밴드였다.
투어를 떠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워싱턴 D.C. 의 블루스 앨리라는 재즈 클럽에 연주 일정이 잡혀있었다. 무슨 우연인지 그때 마이크는 거기에서 무척 가까운 버지니아의 부모님 집에 머무르고 있었고, 공연을 보러 왔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부모님 집에 데리고 가서 그 집에서 하룻밤 머무르게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마이크네 집안은 그리스계 혈통이었는데, 그리스식으로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었던 게 떠오르니까.
그것 말고도 투어와 투어 사이, 한 달 정도의 휴식 기간에 시카고에 머문 때가 있었다. 이미 살던 집을 정리한 다음이라 투어를 마치고는 그다음 투어까지 한시적으로 지낼 곳이 필요했었다. 처음에는 짐을 정리할 겸 한국에 들어왔었고, 그다음은 시카고, 마지막에는 뉴욕에서 지냈었다. 당시에 시카고에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존 다이트마이어이라는 드러머가 살고 있었고,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던 덕 스톤 역시 시카고 출신이어서 그러면 한 달 동안 존과 덕과 함께 음반을 녹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몇 개의 긱을 하고 음반을 녹음하러 스튜디오를 잡았는데, 무슨 인연인지 또 마이크가 그 기간에 시카고에 있었어서 녹음실에 놀러 왔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뉴욕의 여름에서도 만났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조금 흐릿하다. 어쨌건 하고 싶은 얘기는, 학교에서 적당히 알고 지내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 정도를 넘는, 좀 특별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2005년에 학생 비자와 OPT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수많은 연주를 하며, 또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신없이 보냈다. 물론 미국에서와는 다른 한국의 재즈 씬을 온몸으로 겪으며 많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많은 박수를 받으며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가끔씩 유튜브에 Snarky Puppy를 검색해보기도 했었다. 모든 정보를 집어삼킨 지금의 유튜브와는 다른, 당시의 유튜브는 한두 개의 영상을 내 눈앞에 보여주었었다. 친구들도 잘 지내고 있구나, 예전과는 제법 달라진 음악이네,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Flood>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음악을 영상에 입혀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관객을 앞에다 두고 연주하면서 그걸 음원과 영상으로 동시에 기록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 흔하지 않았었다. 실제로 이걸 준비하면서 관객을 위한 헤드폰 앰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에피소드 등을 이후의 인터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 영상을 처음 본 순간,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상처가 되었었다. 학교에서는 친한 친구였고, 메이너드 밴드로 투어를 떠날 때에는 제법 부러움을 샀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너무도 멋진 결과물을 마이크는 만들어냈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안정적인 삶과 고만고만한 음악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몇 년간은 의식적으로 Snarky Puppy의 음악을 피하며 살았다. 맞닥뜨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었기 때문에.
2014년, 벌써 몇 개의 그래미를 수상한 Snarky Puppy의 첫 내한 공연이 있었고, 그 공연이 끝난 뒤에 마이크와 저녁을 함께할 시간이 있었다. 만나기 전부터 좀 걱정이 되었던 것이 있었는데, 이젠 음악계의 셀렙이 되어버린 마이크가 십 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마이크는 십 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친구로 남아있었고,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하는 것을 알기에 무척이나 감사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는 또 십일 년이 지나서야 다시 마이크를 만나게 되었다. 2025년 서울 재즈 페스티벌의 라인업에 Snarky Puppy가 보였던 그때부터 곧 만나게 되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떻게든 친한 척을 해보려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비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럴 만큼 마이크의 커리어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고, 나는 그저 로컬 뮤지션에 학교 선생이 되어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기 전, 몇 개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이 녀석은 예전 그대로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전날, 돼지갈비를 먹으며 어느새 이십 년 전의 추억이 되어버린 옛날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읊었다. 몇 년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십일 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옛 인연에 대한 소중함은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인마님은 이십일 년 만에 Snarky Puppy와 함께 한 곡을 연주했다.
<Lingus>는 우리들 사이에는 제법 유명한 곡인데, 원곡의 코리 헨리의 솔로가 워낙에 인상적이기도 했고, 크리스 포터가 게스트로 연주한 버전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곡의 구조가 명확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이 곡이 유독 인기를 끈 이유는 그런 데에 있을 것이다. 메인 솔로 주자를 위한 공간은 화성적으로 크게 복잡할 것이 없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게 열려있는 상태이다. 코리 헨리는 그 공간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놀라운 드라마를 이끌어갔다. 그코리 헨리의 자리를 대신해서 연주하는 것은 어쩌면 넘기 어려운 벽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솔로를 앞뒤로 감싸는 편곡은 또 자연스럽게 빌드업하는 면이 있어서 잘 끌고 가면 굉장히 드라마틱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어쨌건 공연의 마지막 곡에 소개를 받고 무대에 올라 이십 년이 지난 뒤 처음 같이 연주하게 되는 친구들과 소리로 교감하는 것, 그 광경이 고스란히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만한 일이 아닐까. 다음에는 조금 더 자주 보자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