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고객님께서 사용하시는 컴퓨터는 빈티지 모델이어서 배터리 재고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본사 측으로 주문을 넣어야 하고 그러면 아마 2주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와우, 하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2 주라는 시간은 전혀 놀랍지 않았는데, 빈티지라는 단어를 컴퓨터에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빈티지라.... 보통은 1920년대의 만년필, 1960년대의 펜더 베이스 등은 되어야 빈티지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적절하지 않았나. 이베이에 올라와 있는 가죽 점퍼라면 1980년대라도 빈티지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고작 5,6년 된 물건이다.
컴퓨터라는 것에도 수명은 있을 테다. 사오 년? 혹은 그 이상? 하지만 30년 세월을 버텨준 내 컴퓨터.... 이런 상상 자체가 쉽지 않다.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어느 시점에는 더 이상 OS가 지원하지 않는 사양이 되고 만다. 부품이 하나 둘씩 고장 나고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몇 일 밤이고 새워 작업한 것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나면 이제 오만 정이 떨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십 년 안쪽이겠지.
십 년이라는 시간을 견뎌 온 것으로 빈티지라는 이름을 부여하자면, 물건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니 내 주변의 모든 물건들은 이미 빈티지이거나 곧 빈티지가 되고 말 것들 뿐이다. 빈티지 티브이, 빈티지 책상, 빈티지 시디, 빈티지 옷걸이, 빈티지 헤드폰, 빈티지 책가방.... 끝도 없다.
이 컴퓨터가 빈티지가 아니던 시절, 충분히 나를 위해 봉사해 주던 때가 있었다. 음반을 몇 장 만들어 내고, 끼적이는 잡문을 담아 두고, 이런 저런 용도로 수업에 활용하고, 스타벅스에 혼자 앉아 있는 시간에 테이블 위를 자랑스레 장식하고. 삼십 대 중반이었고, 어쩌면 나는 그때 가장 많은 꿈을 꾸었는 지도 모른다. 끝도 없이 화면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이제 이 컴퓨터는 빈티지한 그 무엇이 되어 저 거대한 은색 랩탑은 뭐람, 하는 느낌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아주 간단한 데모 정도가 아니면 음반 작업을 할 수도 없다. 불안하거든.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이 컴퓨터가 아니면 쉽게 되지 않는다. 마치 손에 딱 달라붙는 악기를 만난 것처럼, 키보드를 누를 때에 힘이 들지 않는다. 머릿속의 생각과 화면에 타타타타 하며 한 글자씩 쌓여가는 것 사이에 잘 스며든다. 다른 컴퓨터의 다른 키보드를 눌러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내가 지금 키보드를 눌러 글자를 하나씩 완성해가고 있군, 하는 과정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언젠가는 이 컴퓨터와 헤어져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