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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Apr 02. 2016

U

Thomas Dybdahl







 나이가 제법 들고 돌아보니 삶의 방식이랄까, 태도 같은 것이 알게 모르게 꽤 많이 변했다. 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저 그 모습 대로인 것도 따져보면 적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청년 시절을 지나던 시절의 나는 도통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지 않으려 하는 중년의 나를 가정조차 하기 어려웠었다. 아예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다. 세상은 끝도 없이 좋은 음악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을 다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시디를 사고 또 사들이던 시절, 기회만 나면 재즈 클럽을 드나들던 시절 말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업으로 삼아 하기 시작한 뒤에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인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연주 활동을 시작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똑같았다. 매달 아마존에서 십만 원 이상 이십만 원 이하로 시디를 주문한다, 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새로운 아티스트나 새로운 음반을 그런 식으로 만나곤 했다. 비틀즈며 헨드릭스, 스티비 원더 같은 이들의 오래된 음반도 마찬가지였다. 십수 년간 재즈에 파묻혀 지내다 고개를 들고 나니 재즈 바깥에도 듣고 싶고 들어야 할 음악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행위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드문드문 음반을 산다. 이제는 애플뮤직으로 새로운 음악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게 되지는 않는다. 몇 년은 된 것 같다.


  대신 이미 들었던 음악들을 듣고 또 듣는다. 한 계절을 한 음반, 심할 때는 한 곡으로 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디안젤로의 부틀렉이었다. 그리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라디오헤드의 오케이 컴퓨터였다가 키쓰 자렛의 Too Young To Go Steady였다. 그 곡들이 너무 듣고 싶어 다른 음악을 차마 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 운전하며 음악을 듣다 고속도로의 출구를 몇 번이고 놓치곤 했다. 빨간 신호등마저 아차, 하며 그냥 지나쳐버린 적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나 좋은 음악이 여기 있는 걸 아는데,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모자랄 만큼 그 안에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새로운 음악을 만나자고 헤매긴 싫다는 기분이랄까. 세상에 좋은 음악은 많지만 내 인생은 스치듯 짧을 뿐이니 정말 좋은 음악을 들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라고 할까.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음악이 바로 이 곡, Thomas Dybdahl의 U였다. 수업 중에 뭔가 하려던 얘기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아무나 요즘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하나만 꺼내서 지금 틀어달라고. 그중 한 녀석이 전화기를 내밀었다. 무심히 믹서에 연결하고는 볼륨 페이더를 올렸다. 그렇게 슬쩍 듣는데 이 곡이 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듯 내게로 왔다. 누구의 무슨 곡이니, 하고 물었고 그 학생은 다시 전화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토마스 딥....딥달?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사람은 아니겠군, 저녁에 다시 들어봐야겠는데.


  하지만 열 시간 넘게 수업을 하고는 넌더리를 내며 집에 돌아오고 나니 도무지 가수의 이름과 곡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밤 열한 시 반쯤 된 시간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주 가끔씩은 나도 선생이란 권위를 이용한다.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아까 그 곡 가수랑 제목 좀 알려줘.


  다행히도 이 곡은 한 계절까지는 가지 않고 두어 주 정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끔씩 꺼내 듣는다. 그리곤 왜 그랬을까를 묻는다. 이 음악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나는 그토록 반복해서 들은 것일까.  


  인트로에서 드럼, 베이스, 피아노에 오르간이 패드처럼 멀리 깔리는 편곡은 지극히 미니멀하다. 코드 진행 역시 별다를 것이 없다. 연주마저도 극히 절제된 상태이다. 가만, 피아노 소리가 뭔가 특이한데? 다시 들어봐야겠군, 라이드 심벌은 이보다 더 덜 칠 수 없을 만큼 줄여서 치고 있네 하는 찰나에 노래가 시작되고, 아예 라이드 심벌은 빠지고 베이스 드럼과 백비트의 스네어만 남는다. 저렇게 텅 빈 소리의 공간 위에 노래라니, 자신만만하군. 이내 피아노가 다시 들어온다. 역시 뭔가 다른데, 피아노 줄에 뭘 대 놓은 건가? 이 친구 노래 잘 하네. 아니, you lifted me up, high and higher라니 이건 교회음악에서나 쓸 법한 가사인데? 아, 그래서 오르간을 쓴 건가?


  인트로를 다시 반복하는 간주에서 그는 신음소리와 같은 무슨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내 다시 2절을 시작할 때 한 옥타브 높게 올려 부른다. 오르간 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음색이 바뀌어 있고 레벨이 아주 조금씩 올라와 귀에 들려온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도 들릴 듯 말듯 슬쩍 스쳐 지나간다. 베이스는 아마도 펜더 프레시전 베이스였겠지, 플랫 와운드 줄 소리 같기도 하고. 피아노 솔로가 시작된다. 토마스 딥달이 직접 연주한 걸까? 전문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 같은 능숙함은 없다. 여전히 천 조각 따위를 줄에 대 놓은 것 같은 뭉툭한 소리로 연주하고 있다. 가운데 페달을 밟은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저 소리에 끌린다. 그리곤 코러스를 뒤로 깔고 오르간 솔로. 오르간 소리가 기분 좋게 찌그러져 break-up 하고 있다. 곡의 클라이맥스를 오르간 솔로가 담당하고는 무심한 듯 인트로를 다시 반복하는 것으로 끝난다. 솔로 뒤에 후렴구를 다시 한번 질러준다거나 하는 건 없다. 지극히 감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음악의 흐름은 조금도 과장된 선을 타지 않는다.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게 유독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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