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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Aug 23. 2017

사노 요코

<사는게 뭐라고>

사노 요코의 <사는게 뭐라고>를 샀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교보문고에 두 시간 가까이 주차를 했으니 뭐라도 사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좀처럼 어떤 책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폴 오스터도,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까지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인문학이며 심리학, 예술을 지나 건강 서적들까지 하나둘씩 뒤적거렸지만 사고 싶은 책이 없었다. 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은 두세 권 정도 사야지, 하고 마음먹고는 느린 걸음으로 서점을 빙빙 돌며 눈에 들어오는 대로 들춰보는 것, 그 행위를 좋아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는 고상한 방법은 습관이 되었다. 레코드 가게와 서점은 딱히 할 일이 없던 대학생이 서너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공기는 쾌적하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뭐니 뭐니 해도 서점은 조용하고 레코드 가게에는 괜찮은 음악이 흘렀다.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고르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시디를 고르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모습이 있었다. 같은 서점 안에서도 소설 코너와 문구 섹션의 사람들은 옷차림이 다르다. 믿기 어려우면 한 번 찬찬히 둘러보면 알게 될 거다.


  어차피 주차비로 나갈 돈으로 책을 한 권 사는 거니까 그냥 아무거나 집어 들면 되었다. 그런데 시간에 쫓기면서 뭔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졌다. 무료 주차는 두 시간을 줄 것이다, 나는 이 빌딩에 들어선 지 한 시간 사십 분쯤 지났다, 하는 생각이 들면 도대체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처음에 너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탓이다. 결국,


   작은 책을 샀다. 보통 작은 책은 싸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내가 도서관에서 대출했었던 책이다.

  

  괜찮다, 어차피 몇 장 안 읽고 반납했었다.


  며칠 동안 <사는게 뭐라고>는 작은 가방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약간의 자책감을 느끼며 책을 꺼냈다. 사실 무작정 책을 사는 이유는 그거다. 자책감에 못 이겨 몇 장이라도 읽게 만들려는 것. 나라고 사들인 책의 삼분의 일도 채 읽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 오분의 일 정도를 겨우 읽는다고 하자. 책장에 그럴듯한 컬렉션이 쌓여가고 마음에는 부담이 좀 남는다. 괜찮다, 김영하도 뭐라고 했었다. 책은 그냥 사는 거라고, 사둔 것 중에서 읽는 거라고 했었던 것 같다. 제법 세일즈 감각이 있는 양반이다.


  첫 줄에, 아니 첫 줄과 두 번째 줄에 나는 피식, 하고 사노 요코의 팬이 되고 말았다. ‘6시 반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는데 믿을 수 없다’라니, 하하하.


  늘 신기하게 생각하는 게, 어떤 사람의 문체가 번역을 거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물론 번역 이전의 문체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궁금한 마음이 크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본어를 배울 생각은 없다,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으니.


  한 페이지를 채 읽기 전에 사노 요코는 지독히도 짧게 문장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뭐, 내가 알아챘을 정도니 말 다했다. 툭툭 끊어지는 문체가 에쿠니 가오리와 비슷하네요,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건 내 얘기다.


  심플한 문장을 쌓아 심플하지 않은 세계를 그려내려 한다는 하루키의 말 -<1973년의 핀볼> 혹은 그 젊은 시절 하루키 소설의 한국어판 독자 서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었다, 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단 신춘문예 따위에 당선이 되어야 제대로 된 모양새가 잡힐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는 뭔가 부끄럽다. 하여간,


  짧게 쓰자,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건 하루키였는데 내 습작을 읽은 주변 사람들은 자꾸 에쿠니 가오리를 떠올렸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하는 심정으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한두 권 읽었는데 과연 제법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전까지 에쿠니 가오리는 한 번도 읽지 않았었다.


  문장이 길고 짧은가, 하는 것은 당연히 번역을 거쳐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표면적인 것 말고 그 사람이 연상되는 문체를 말하는 거다.  글 쓴 사람의 표정이랄까, 말투며 몸짓이 연상되는 -당연히 나는 사노 요코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상상할 뿐이다- 그런 것.


  새벽 다섯 시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기 이 분 전, 눈이 번쩍 떠지는 사람이 있다. 주위에서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해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습관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를 내리고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네 시간 동안 글을 쓴다,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사노 요코라고 그런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노 요코는 믿을 수 없다, 하고 고개를 털어버린다. 나는 사노 요코가 하고 싶었던 얘기란, 그건 당신들 얘기고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다 늙어빠진 지금 그런 사람들의 얘기에 움츠러들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 이들이란 그리스 로마 신화에나 나올 법 한 얘기야,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튕겨내 버린 게 아닐까. 굳이 말하자면 시니컬한 그런 느낌. 제법 까다로운데 약간은 소심해서 멈칫하는 성격, 그런 게 글에 바로 드러났다.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공감할 독자를 만날 것이다. 영화도, 음악도 마찬가지 이리라. 나는 사노 요코의 독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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