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주변에는 나름 멋을 부린다고 대학생 시절에나 입었을 법한 옷들을 꺼내드는 사람도 제법 많다. 쨍한 색깔의 반팔 폴로셔츠의 깃을 세워서는.... 아이고 맙소사. 그것보다는 세련돼 보이고 싶다. 그러니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어떤지 약간은 신경 쓰는 편이다. 옷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물의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까. 내게 제일 재미있는 취미생활 중 하나는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제각각인 걸음걸이를 살피는 것이다.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며 관찰하는 건 습관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은 대체로 악기에 관심이 많고, 그건 학생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한 것 같기도 하다. 학생 때라면 돈이 없는 게 디폴트값이고, 가끔씩 예외가 있는 정도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혹은 비싼) 악기는 넘쳐난다. 궁금하기도 하고, 갖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 유튜브에는 각종 악기 시연이나 리뷰 영상이 넘쳐난다. 그런 영상을 소비하는 이들이 있고, 그런 영상을 만들어서 그들의 소비를 유도하는 이들이 있다. 이쪽도 산업의 모양을 갖춘 지 오래다. 규모가 크지 않을 뿐이지.
종종 “교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악기를 고르세요?” 하는 질문을 받게 된다. 사실 나는 악기를 많이 사고파는 스타일이 아니라 잘 모르는데 말이다. 저 나이쯤 되면 나보다는 악기를 잘 알고 있을 거야, 저 사람 악기가 내 거보다는 몇 배 비쌀 텐데(헤드에 친절하게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으니 모르기가 쉽지 않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내가 듣기에는 비슷비슷한데, 하는 식의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거의 이십 년째 학생들이 가져오는 악기를 눈앞에서 들어보고 궁금하면 잠깐 뺏어서 쳐보는 경험은 다양한 악기를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사실 그보다는 한 악기를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연주하면서 그 악기를 속속들이 알게 된 것, 그 악기와 나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가(혹은 불편함이 남아 있나) 하는 것들이 쌓여서 나름 악기에 대한 철학이 명확해졌다.
그 질문에는 늘 정해진 대답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야 서로 말이 통하는지가 중요하지만, 사물과는 내가 이야기할 것도 아니니 일단 바라봤을 때 기분이 좋아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반쯤은 농담을 섞은 듯 들릴 테지만 사실은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이다. 악기는 일단 디자인이 예뻐야 한다. 눈에 거슬리면 어찌 되었건 실격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진심이라고 해도 악기는 예쁜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자니 뭔가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 살짝 부끄러워진다. 악기는 누가 뭐래도 좋은 소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취미가 아니라 업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논리를 찾아야 했다. 요즘은 악기들이 다 잘 나와서 웬만한 브랜드의 악기면 충분해, 자기 마음에 드는 악기를 골라서 열심히 연습하는 게 최고야. 어떤 악기를 가져야만 가능한 것, 그런 거는 없다구.
게다가 사람을 대할 때에는 외모가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가의 여부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말하는 거니까 뭔가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먼저 던지고 난 뒤 악기는 디자인이 제일 중요하지... 하는 말을 하는 셈인데, 학생들은 종종 두 가지 이야기 사이에서 살짝 혼란스러워한다. 뭔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럴 때 잽싸게 다른 얘기를 꺼내면 된다. 자, 지난주에 레슨 한 거는 충분히 연습해 왔어?
자신의 연주가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 상식적인 연주자라면 방 안에 틀어박혀 연습에 매진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악기 탓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간은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다. 학생들에게 하는 얘기할 때와는 도통 다른 방향으로 사고의 흐름을 이어간다.
'.... 이 악기는 도통 내 손에 맞지가 않아. 십 년 동안 이 악기로 연습한 시간이 있는데, 지금까지 안 되는 거면 앞으로도 안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손가락이 동양인 체형에서도 짧은 편인데, 서양 사람들의 긴 손가락에 맞춰 개발된 악기가 손에 붙을 리가 없지, 넥을 조금 좁게 만들면 줄 간격도 좁아지고 좋을 텐데, 스케일도 좀 짧게 하면 안 되나? 요즘 시대에 벌써 오륙십 년도 넘게 지난 첫 번째 디자인 스펙을 그대로 고수할 필요가 있나?....' 이런 불만을 계속 늘어놓다 보면 어느새 내 손에 잘 맞는 악기만 만난다면 나는 훨훨 날아다니며 대가의 연주를 해 낼 것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물론 비용이 많이 드니까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의 일상에서는 오로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고, 몇 년에 한 번 정도 큰 맘을 먹어야 일어나는 일이다. 메인 악기라고 할까, 비싼 녀석이라면 십 년도 더 사용하곤 한다. 악기는 도구일 뿐이다, 하고 호기를 부리는 편이라 이곳저곳에 상처가 많이 남아서 팔기도 애매하다. 처분한다고 마음먹자니 정도 많이 들었고 솔직히 좀 귀찮기도 하다. 중고 시장에서 얼마를 받아야 할지, 가격을 매기고 흥정하고 하는 신경전도 쉽지 않은 성격이다.
어쨌건 마음만 먹으면 악기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은 머릿속을 계속 자극한다. 제정신을 차리고 연습을 시작하려면 몇 시간은 지난 뒤이다. 온갖 악기 정보를 검색하다가 문득 한없이 0에 수렴하는 통장 잔고를 떠올리고 난 다음에야. ⓒjazzsnobs2023
한편으로, 피아노 주자는 오늘 연주할 클럽의 피아노가 어떤 악기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조율이 틀어져 엉망이건 건반 하나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건 말이다. 대신 무거운 악기를 나를 필요는 없다. 여덟 시 연주 시작이면 일곱 시 오십팔 분에 도착해도 별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도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모양이다. 피아노 주자도 가끔씩은 키보드를 들고 와야 하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속으로 약간 고소해한다. 웰컴 투 더 클럽.
하지만 나는 피아노 주자와 결혼한 지 오래라 종종 한쪽 어깨에는 키보드를, 다른 어깨에는 베이스를 메고 이동해야 하는 게 함정이다.
어떤 사람은 악기와 진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의 대화 말이다. 몇 년 전 어느 입시장에서 긴장한 나머지 들고 들어온 악기를 앰프엔가 툭 부딪히고는 “아 xx야 괜찮아? 미안해, 어쩌지....”하던 학생도 있었다. 베이스 헤드에 리본 같은 걸 걸어두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악기에 이런저런 가벼운 장식을 하는 거야 흔히 있을 법한데, 그 친구라면 아마 머리띠를 해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제법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어가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최소한 베이스는 나에게 화를 내진 않으니까. 그런 친구를 이해하기 힘들다면 조용히 ‘평범’ 카테고리 바깥으로 살짝 밀어놓으면 된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최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