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몇 년 미국에 살았다고 했다. 영어로 불편함 없이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니 어떻게든 먹고살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어깨는 양 옆으로 쫙 펴져 있고 걸음걸이는 약간 건들거렸다. 웃을 때면 가지런한 이빨을 모두 드러내려고 말겠다는 듯이 주저함이 없었다.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입꼬리만 조금 올라가는 미소가 전부였었다.
나중에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꼭 포르투갈 어를 배울 거야. 왜? 따라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어. 뭔데? 플로 즈 리스, 백합화란 뜻 이래.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포르투갈어가 너무 예쁘게 들리는 거야. 검색을 해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라도 한 건지 신에게 한탄하며 괴로워하는 굉장히 슬픈 내용인 노래인데, 그런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운 소리로 들려오는 거야. 그런 소리에 둘러싸여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언어를 가지고도 브라질 사람들은 연인끼리 싸우기도 하고 그러겠지?
그와 가까워진 건 대학에 간 다음이었다. 몇 번의 입시를 거쳐 힘겹게 들어간 학과에 그가 있었고, 3월도 거의 다 지나간 다음 강의실 옆 계단에서 마주친 다음에야 아 맞다, 싶었다.
어, 너구나. 응, 잘 지냈어? 안 그래도 누가 그러던데, 너 이번에 00학번으로 들어왔다고. 야, 알았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냐. 이제 곧 마주치게 되겠지 싶었어, 연락을 하자니 좀 뜬금없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밥 먹었냐, 로 시작되는 카톡을 보내는 건 늘 나였다. 아니, 아직. 그때마다 대답은 똑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 서로 시간표가 너무 달라서 월요일은 오후 세 시, 수요일은 열두 시, 목요일은 두 시 반쯤, 들쑥날쑥하긴 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는 입대를 했다. 처음 두어 번의 휴가 때는 반갑게 만났지만, 그다음에는 도통 못 보게 되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나름의 삶이 있다.
그리고 나도 일 년 반, 학교를 다니다 입대를 했다. 제대를 할 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 친구와는 제법 뜸해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할 정도가 되어서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브라질에 갔었어.”
“아, 진짜?”
“그거 알아? 우리나라에서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나라니까 지구를 이쪽 방향으로 돌아서 가건 저쪽 방향으로 돌아서 가건 걸리는 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어, 지하철 2호선이나 마찬가지라구.”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엘에이 방향으로 가는 것과 두바이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게 강남역에서 신촌으로 갈 때 신도림 방향으로 가나 강변 방향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에 공감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그때껏 타 본 비행기는 제주도행이 전부였으니까.
“비행기 갈아타는 시간까지 다 치면 한 30시간은 걸려야 갈 수 있다구.”
“브라질에 가서는 뭘 했는데?”
“그냥 있었어. 아, 기타를 좀 배우긴 했지, 브라질이니까.”
광대뼈가 조금 도드라져 보였고, 마냥 커다랗던 웃음은 제법 작아져 있었다.
***
마지막으로 만난 날. 그가 말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좀... 이상하게 들릴 텐데”
“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하고 안 되는 거면 어쩔 수 없고.”
“Turn out the stars.”
“뭐라구?”
“Turn, Out, the Stars.”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분명히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동시에 등 뒤의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턴, 이 아니야, 잘 들어봐, 알 하고 엔이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나야 한다구, 알 하고 엔, 두 글자를 한 번에 소리 낸다고 생각해 봐, Turn out the stars. 근데, 부탁이 있다고 한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발음공부를 시키고 그래? 그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부탁이야.”
***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씩 별을 꺼 본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는 하나씩 하나씩, 그때 그가 혼자서 별을 꺼 나갔던 것처럼. 하늘에 가득한 별의 숫자만큼 끝없이 반복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한참 지나면 빛이 조금씩 힘을 잃는다. 도대체 얼마나 깊은 잠에 들고 싶어 별빛조차 없는 어둠을 갈망한 걸까. 남은 마지막 별을 끄고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jazzsnobs2022
https://youtu.be/BMh3F4U5--E?si=HwymxZ8jfoA73AA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