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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Dec 25. 2023

동일시 혹은 구별 짓기

<Blue Note Records: Beyond The Note>를 보고


https://youtu.be/6D0uVDnCOR4?si=pwHc8IlhIzOzb9iy




1.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블루노트 레코즈라는 레이블과 그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음반, 그리고 그 음반을 채워갔던 음악인들의 이야기이다. 아니, 그들의 음악과 삶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과 전해 들은 이들이 자신의 음악과 삶을 비추어보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고 편집하여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감독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장면에는 공감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제법 불만을 느끼다가 한참 동안 작지 않은 고민에 빠지는 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두의 합이다.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늘 이런 식이다. 

  독립 음반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니까 쉽지 않은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알프레드 라이언, 프랜시스 울프의 이야기가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 둘은 철저한 이방인이었는데, 그들이 재즈 씬의 중심에 들어서서 결국 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독일 억양이 강한 백인 이민자가 미국의 음악, 그것도 흑인 사회가 중심이 된 재즈를 제작하는 것이 이채롭다. 

  루디 반 겔더의 사운드는 널리 알려져 있고 내게도 익숙해서 큰 놀라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첫 번째 스튜디오가 일반 주택의 거실이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오히려 경이로움을 느낀 건 뤼드 마일스의 디자인이었다. 블루노트 음반이라면 일관된 하나의 톤을 가진 디자인이라고 막연히 기억했었는데,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고, 명료한 컬러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전체의 작품을 통해 통일된 하나의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2.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되었지만 오히려 나에게 낯선 것은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재즈 연주를 이해하려고 하는 음악인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음악을 순수한 소리의 탐닉만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아래와 같은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뛰어난 음악인들의 연주를 듣는다. 하지만 각자의 악기를 통한 그 익숙한 내면의 싸움, 내적인 몸부림(도 듣는다). 후대에 나와 같은 세대는, ‘아니 왜 이렇게 우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왜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을 거는 거지?’ 하게 된다.” (데릭 핫지)


“...블루노트의 많은 예술가들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처한 생존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은 음악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테레스 마틴)


“...대가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자기 자신됨, 스스로의 경험에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이었다. 자기가 인생을 통해 겪은 것이 자신의 소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뛰어난 예술은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나왔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다. 그게 재즈가 태어난 지점이고 힙합이 나온 곳이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로버트 글래스퍼)


  한편 현시대의 청자는 흔히들 블루 노트의 음악을 전통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비해 그들은 블루 노트를 혁신의 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블루노트는 시장의 판도를 바꾼 혁신자들의 레이블이다.” (앰브로스 애킨무시리), 


“...블루노트 레코드의 역사를 도식화하면 매 십 년마다 그 레이블 소속의 아티스트들이 음악계를 뒤집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호레이스 실버는 그전에 용납되지 않던 펑키한 것을 연주했고, 아트 블래이키는 비밥에서 쓰이지 않던 백 비트를 연주했다...지금 듣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표현법이 되어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게 들리지만 그 당시로는 아주 급진적인 것이었다.” (돈 와스)


  그렇다면 재즈란 무엇인가? 로버트 글래스퍼가 늘 이야기하듯, 재즈를 어떤 정형화된 무엇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그에 담긴 정신 혹은 태도라고 볼 것인가? 그들은 혁신적인 태도 자체를 재즈의 정수로 이해하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 시기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구성 요소들에서 재즈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음악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과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을 동일시하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짓고 있는가? 

  켄드릭 스캇은 아트 블래이키를 소개하는 Pee Wee Marquette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이름이 저렇게 소개되기를 꿈꿨다. 이는 자신이 아트 블래이키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다. 아트 블래이키와 같아질 수 있다는 꿈을 꾼다. 아트 블래이키와 동일한 인간이기에 꿈꾸어 볼 수 있는 꿈이다. 한없이 움츠러들게 하는 역사 앞에서 그들은 꿈을 꾼다. 

  테레스 마틴은 이너시티의 분노를 표출하는 자신의 세대와 시민권운동에 동참하던 그들을 동일시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소리를 찾아간 뗄로니어스 몽크의 음악에서 자기의 자기 됨을 사과하지 않는unapologetic 힙합의 태도를 발견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재즈는 자신의 음악이라는 것을 그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마음껏 재즈와 힙합은 같은 것이라고 외친다, 결국 자기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니 재즈는 이런 음악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어쩌면 역사 속의 음악과 같아지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는 선대의 음악이 주는 교훈일지도 모른다. 


“...블루 노트는 그 레이블에서 너무 많은 엄청난 음악인들이 녹음한 레이블이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은 전부 그 레이블에서 녹음을 했다고 할 만큼! 하지만 내가 나의 음악을 할 때면 그런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도 위축될 것이니까.” (로버트 글래스퍼)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과 선을 긋는다. 그들이 이룬 성취는 까마득하게 높고 멀게 느껴지므로 무의식 속에서 어떻게든 다름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인종적으로 다르고,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르다고 구분한다. 얼마간 정당한 정당화이다. 

  그렇게 다른 –열등한- 음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들의 음악과 얼마나 유사해지는가를 성취의 척도로 삼게 한다. 끊임없이 지금 시대의 가장 힙한 음악을 찾아 듣고  습득하여 최대한 비슷한 음악을 만들어 내려는 태도를 갖거나, 전통적인 스타일의 재즈를 가장 가까이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그것만도 엄청난 재능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치려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본다면 적지 않은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내 안에는 어떤 소리가 담겨 있으며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등을 묻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종종 음악적인 언어가 미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로는 반목한다. 평생 남의 것만 따라하면서 스포츠 경기를 하듯이 경쟁할 것이냐는 질문과 숙련된 음악 언어의 아름다움을 무시할 것이냐는 질문을 서로에게 던진다.

  이와 같은 반목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초인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조성진이나 임윤찬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 자생하는 재즈 음악인들 중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취를 보이는 이가 나온다면 비로소 그 후대의 음악인들은 나 역시 그 –혹은 그녀- 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사람이야, 내 이름이 저렇게 불리는 날이 올까, 하는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인가? 음악 언어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고, 창조적인 자기의 목소리를 가진 그런 존재가 우리 안에서 성장해 우뚝 선다면 말이다. 

  하지만 집단 안에서 행해지는 즉흥성을 재즈 연주의 핵심으로 꼽는다면 이와 같은 연주자의 등장은 당분간 요원한 일일지 모른다. 집단 내의 개인임을 자각하며 자신의 자신됨을 마음껏 발현함과 동시에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조화를 꿈꾸는 것 말이다. 모두가 자기 됨을 강렬하게 주장하며, 타인의 자기 자신됨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인정하고 그와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재즈의 가장 본질적인 면모 중 하나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처럼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체득하는 것이 크다고 인정할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의 영향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렇게 재즈 연주야 말로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음악 행위인데, 개인이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P.S.


  적자생존을 거쳐 살아남은 종은 그 흔적을 개체에 남긴다. 지금의 블루노트는 80년 간 진화해 온 결과이다. 초창기의 블루노트 모습 그대로를 지키려 했다면 아마도 멸종했을 것이다. 어쩌면 특정 기관이 유달리 비대한 모양으로 진화했기에 블루노트라는 종은 살아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이 절대적인 과제인 종에게 이상적인 균형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jazzsnobs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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