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atia Buniatishvili
이 곡은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Ennio Morricone의 대표작 중 하나인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수록곡이다. 이 영화음악은 나에게 있어 Cinema Paradiso보다도 훨씬 더 각별하다. 사실 The Mission도 그렇다. 왠지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보자면 열이면 열 모두 엔니오 모리꼬네! 시네마 천국! 하고 주문처럼 외는 것 같지만 말이다. 사실 시네마 천국의 음악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내 인생 음반인 팻 메시니와 찰리헤이든의 듀엣 음반에도 실려있다). 영화도 제법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선호라는 게 있을 수 있지 않나.
어찌 되었건 나의 감상에 있어 세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음악을 먼저 닳도록 듣고 난 뒤에 영화가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영화에는 큰 관심이 없기도 하고, 원체 옛날 영화이기도 하다. The Mission은 1986년 작이고, 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1984년 작이다. Cinema Paradiso가 1988년에 개봉되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외국 영화에 빠져든 할리우드 키드가 아니고서야 우연한 기회에 비디오로 접하게 될 수밖에.
비틀즈가 미국 땅에 상륙하던 시절(아마도 1964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음악에 전 미국이 들썩이던 것을 두고 British Invasion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충격적인 문화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화려한 활동의 종지부를 찍은 뒤로부터 십 년도 넘게 지나서야 뒤죽박죽인 순서로 그들의 곡을 듣게 되었었다. 아마도 Yesterday, Michell, Eleanor Rigby, Let It Be, Back In The U.S.S.R, Help!, 이런 식이었으리라.
새삼 생각해 보면 어떠한 작품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를 지나 다른 세대에게 전해지고 또 그들의 마음을 흔들기까지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들과 언어조차 공유하지 않는데 말이다. 가사를 배제한 소리만으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사를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그 감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때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까지도 알 길이 없다.
처음 The Mission을 화면으로 볼 때, 내게는 마치 기나긴 뮤직비디오와도 같았다. 귀에 익은 음악이 펼쳐지기 위한 수단으로 스토리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은 감상의 순서가 뒤집힌 사람만 겪게 되는 일일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로버트 드 니로, 그들의 연기가 먼저가 아니었다. Gabriel's Oboe가 끝나면 이내 Ave Maria Guarani가 나와야 했다. Remorse와 The Mission을 지나 River를 향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흰 옷을 입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쏟아지는 총탄을 향해 묵묵히 걷고 걷다가 기어이 가슴에 총알을 받아들이고 쓰러지는 순간에 다시 깔리는 Gabriel's Oboe의 변주는 영상과 함께 완성되고 말았다. 음악 자체로도 완결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운 피아니스트이다.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알듯 말듯하니 Khatia Buniastishvili라고 알파벳을 나열하긴 하지만, 몇 번이고 확인을 해야 한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는 그냥 카티아 비 어쩌구라고 내 멋대로 부르고 있지만.
몇 년 전, 내한 공연을 전후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설득력이 있는 연주라는 생각을 했었다. 음악의 표면에 흐르는 감정이 넘치면 나와는 뭔가 정서가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녀의 연주는 지독히 감정적이어서 조금 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할 만했지만, 그렇다고 느끼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감정에 휘둘릴 수 밖에는 없었어, 하고 말하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 기꺼이 수긍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내가 클래식 음악을 듣고 이러니 저러니 평할 만큼의 이해가 있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더 직관적인 그 순간의 감상을 말하는 것에 가까우니 오해하진 마시길). 하지만 나중에 찾아 들은 라벨 피아노 협주곡에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기도 했다. 물론 나 따위가 해석에 동의하건 말건, 그녀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탁월한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저 꼭대기까지 가 닿은 사람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소품 같은 영화음악의 테마를 녹음했다는 것이다. 음반에 이런 곡이 들어가 있으면 벌써 불안해진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표현의 폭이 끝 간 데 모를 연주자가 적당히 좋은 연주를 하는 것,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세계에서 벗어나 잠시 한숨 돌리는 것 같은 음악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게 불쾌한 감정이 일 때면 자격지심은 아닌가 늘 엄격하게 돌아보곤 한다. 이건 아닌데, 싶어도 그들만큼 섬세하게 연주해내지 못하는 재즈 씬에 속해있으니까.
카티아는 복잡한 전개가 없이 심플하기만 한 멜로디를 그대로 연주했다. 그것도 아주 느린 템포로. 듣고 있자면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런 템포로 음악을 끌고 가는 카티아의 담대함에 감탄한다. 연주가 흘러갈수록 처음 느낀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정의 깊이가 명확해진다.
카티아의 왼손이 낮은 B를 연주할 때 그 위로 피어오르는 배음을 들으며 피아노라는 악기는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악기에서 그러한 울림을 끌어내는 카티아는 이 곡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고작 대중들의 관심을 조금 끌기 위한 얄팍한 생각으로 연주한 음악이 아니다. 이 곡은 분명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클래식 연주자들이 클래식 이외의 레퍼토리를 선택해서 연주할 때 느껴지는 '이렇게 치면 되는 거겠지?' 하는 정도의 미세한 불확실함도, 혹은 슬쩍 끼어드는 '뭐 이런 곡이라면야, ' 하는 태도 역시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진지함 앞에 적당히 멜로디를 연주하고는 '오케이, 이제 솔로를 해 볼까, ' 하는 식의 재즈 뮤지션의 새삼 태도가 부끄러워질 뿐이다.
하지만 그녀도 이런저런 비난에 휩싸였을지 모르겠다. 마치 조슈아 레드맨이나 로이 하그로브가 정통적인 재즈 사운드를 벗어나는 음악을 하던 시기에 겪었었던 것처럼.
카티아가 소중하게 연주해 주어 무척이나 감사한 <Deborah's Theme>.
현악기 편성의 원곡도 완벽하다고 느낀다. 세상에 두 가지 버전의 완벽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