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bie Hancock [RIVER: the joni letters]
내게 "이 시대의 음악은 이 시대의 사운드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해준 황병준 기사님을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은 내게 적당한 호의를 갖게 된 모양이었다. 첫 통화의 내용은 "은창씨, 이렇게 믹스한 파일을 보내시면 마스터링 단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물론 모른 척하고 그냥 진행해도 저야 상관없겠지만 차라리 다시 작업해서 보내시는 게 결과물은 더 나을 겁니다. 마스터링 날짜는 다시 잡도록 하죠."라는 얘기였으니, 이후에 그가 보이는 작은 배려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된 게 사실이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이유로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가 일인 다역을 하는 게 당연해진 시대다. 기술의 진보는 르네상스맨의 재현을 가져왔다. 컴퓨터 한 대를 앞에 두고 작곡, 편곡, 녹음은 물론이고 믹싱이며 마스터링까지 웬만큼 해 내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말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영상 작업까지 막힘없이 해내는 이들이 속속 나타난다. 이쯤 하면 진입장벽이 낮아진 건지 아니면 오히려 높아진 건지 알 듯 말 듯하다. 나처럼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못하는 단순한 종류의 인간에게는 만만치 않은 허들이 된다. 여러 가지를 적당히 잘해 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사람들이라면 더없이 좋은 세상일 테다.
내가 처음 맥북프로라는 컴퓨터를 사고, 로직 프로라는 프로그램을 인스톨해서는 어찌어찌 눌러보던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2009년이었으니까 벌써 한참 전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오래된 방식으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와 협업해야 했었다. 예산이 작다 못해 없다에 가까운 국내 재즈 음반의 기획이라도 그랬다. 그러니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해가 거듭할수록 음반을 제작하고 발매하는 것이 어려워져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전문가들이 대단히 전문성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다(이 생각은 조금의 경험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아무리 열심히 의사소통을 하며 이런 소리를 내고 싶다고 얘기를 해도, 후반작업을 거치고 난 재즈 음반은 어색하기만 한 소리가 났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내가 하고 말지, 어차피 대단히 팔리지도 않을 음반이니 비용이라도 줄이자구.'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정도는 내가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들이 잘하는 영역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차피 내 머릿속에 있는 소리를 찾아내주진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가 찾아가다가 절반쯤 성공하고 절반쯤 포기하고 난 결과물과 크게 장단점이 엇갈리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해보다가 이거 쉽지 않네, 하는 생각이 들면 흔쾌히 받아들이고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는 거였다. 기껏해야 내 얼마간의 시간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에 불과할 테니까. 심지어 그 과정에서 경험한 것도 내게는 소중한 배움일 것이었다. 딱히 잃을 게 없었다.
Herbie Hancock의 [River: the joni letters]는 몇 장 안 되는 음반을 내 손으로 믹싱하는 과정에서 늘 반복해서 듣게 된다. 흔히들 하는 표현으로 레퍼런스인 셈이다. 레퍼런스, 기준점이라는 의미에 너무도 잘 부합한다.
내 출신이 재즈 연주자라 그럴 텐데, 아무리 좋은 사운드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화성의 색채감이 동반되지 않으면 이내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훌륭한 재즈 연주가 투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사운드로 녹음된 것을 듣자면 그것도 거슬리기 일쑤다. Charlie Parker와 같은 이의 음악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걸 보면 모순적이긴 한데 말이다. Miles Davis의 [Kind of Blue] 리마스터반을 들었을 때 '이게 아닌데, ' 싶기까지 했다. 분명 사운드가 더 명료해지고 악기 간의 밸런스도 개선되었으며, 뭐니 뭐니 해도 오리지널 음반에서 잘못 녹음되어 생긴 피치의 문제까지 조정되었으니 음원의 소리로는 훨씬 더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Kind Of Blue]가 아니었다. 지미 캅의 녹슨 심벌을 누가 밤새 광택제로 연마해 버린 것 같은 미세한 이질감이 생겨버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어울릴지 몰라도, 오래된 술은 오래된 부대 안에 그대로 담겨 있어야 제맛이라는 의미였을까?
어쨌건 이십 세기를 지나 이십일 세기를 살아가는 나는 굳이 찰리 파커며 마일스 데이비스 시절의 소리에 나의 음악을 담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인위적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음악을 이 시대의 소리로 담은 재즈 음반은 어떤 게 있을까, 하며 집에 있는 씨디장을 뒤적이다가 만난 게 이 음반이다.
지나치게 팝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블루 노트 사운드도 아닌 음악이다. 충분히 깨끗하고 세련되었지만, 그렇다고 어쿠스틱함을 잃지 않았다. 게다가 끝없이 솔로에 솔로를 이어가지도 않는다. 음악이 필요로 하는 만큼 즉흥연주가 담겨있다. 하지만 얄팍하지 않다. 누가 뭐래도 허비 행콕이며 웨인 쇼터, 데이브 홀랜드와 비니 칼리유타가 음악의 기반을 쌓아냈으니까. 그들은 스튜디오에서도 쪼그라들지 않고 음악을 향해 몰입해 낸다. 그 위에 좋은 노래가 덧입혀져 있다. 노라 존스, 티나 터너, 코린 베일리 래, 그리고 조니 미첼 자신까지 등장한다.
첫 곡, Court And Spark의 인트로를 듣는다. 파지올리 피아노 뚜껑 안쪽까지 머리를 들이댄 마이크를 통해 내가 평소에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린다. 아무리 조심스레 밟아도 피아노 페달은 잡음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드럼 마이크에 끌려 들어갔을 그 공간의 노이즈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비니가 브러쉬로 사운드를 채워가다가 문득 날리는 첫 오픈 하이햇의 어택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들려 아주 조금 움찔하게 된다. 리오넬 루에케는 전통적인 재즈 음반에서라면 좀처럼 듣기 어려운 방식으로 슬쩍슬쩍 공간을 채운다. 단음을 통해서건 코드를 연주하건 말이다. 노라 존스의 목소리는 그녀가 데뷔하던 시절보다 제법 두꺼워졌고, 그래서인지 연주자와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잘 섞여 들고 있다. 재즈 음반은 보통 이만큼 섬세하지 않다. 소리와 공간으로 음악을 만들어가기보다 솔로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솔로이스트로의 역량으로 따지자면 이 사람들만 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굳이 압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이런 걸 '헤비급 선수의 잽'이라고 표현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툭 던지는 것이지만 듣는 이들은 그냥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게감이니까.
https://youtu.be/RrNs4_FgzOI?si=2pB43Z7uLD7qSU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