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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zzyhyun Aug 31. 2023

파란창고에서 재즈 듣기-51마디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계몽의 변증법

 


음악은 필요한가. 이 자문에 자답하기 위해 나는 수많은 사고를 거쳐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추려보자면 이렇다. ​


 첫 번째. 내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 내가 생각하는 음악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악의 정의가 완벽하게 합일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정도로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가. 세 번째. 나의 이런 사고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나의 추리는 세 번째 자문에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다. 나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는 독립적이면서도 소외된 한 개인의 고립을 증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말은, 단어가 가지는 권력욕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나의 생각을 공개된 플랫폼을 통해 드러냈을 때, 반대든 찬성이든 역학적인 상호 관계를 불러일으킬만한 에너지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겠다는 점에서, 나는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 견해는 아주, 대단히 부정적임을 인정하는 바다. ​


 나는 왜 부정적인 인간인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나는 어두운 면을 먼저 바라보는 데에 생물학적으로 특화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어두운 면에만 주목하려는 나의 강박은 ‘공포’에 대한 과민성 반응이리라. 나는 무섭다.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렵다. 그렇지 않은 척해도 사실은 걱정으로 점철된 생각의 필터를 가지고 있다. 그 필터조차 거슬러내어 출수된 긍정이 있다면, 그건 진짜 긍정적인 사실이거나, 긍정의 탈을 쓴 부정일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책을 꽤나 많이 반복해서 읽은 것은 그들의 논법과 어휘가 어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특유의 차갑고 시린 부정적 견해 때문이었다. 결코 쉽게 긍정하지는 않겠다는 굳은 결의처럼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당시의 사회와 경제, 문화에 대해 일말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고 글로 된 칼을 휘둘렀다. 나는 그 해체 방식이 좋았다. 쉽게 긍정하지 않고, 아둔하게 에둘러 뭉뚱그려 부정하지도 않는 표현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니까 굳이 건드리지 말고 자극하지 말자 했던 자기검열이 필요 없는 공간이 이 책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공간에 일종의 월세를 내고 들어앉은 셈이다. 거기서 달콤한 부정의 꿀을 빨았다. 아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견해에 대한 나의 주석들이다. 어떤 것은 음악에 관한 단상이며, 어떤 것은 그저 우울 증세를 보이는 필자의 분개다.​



*1* 새로운 예술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강변

p. 14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부합되지 않는 표현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으며, 수명을 다한 언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리는 사회의 메커니즘에 의해 효과적으로 채워진다.


p.16 구제불능의 상황에서 빚어진 대표적 현상은 닳아빠진 언어를 가지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개혁가가 그의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마모된 범주들과 함께 그 뒤에 숨어 있는 사악한 철학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분쇄하고자 하는 기성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p.23 루터에게서나 베이컨에게서나 실용적 생산성이 없는 인식의 기쁨은 창녀와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부르는 만족이 아니라 “조작”, 즉 효율적인 처리 방식인 것이다.


p.25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p.27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다.

 *전통을 선호하는 보수주의자들과 틀을 깨트려 새로운 형식과 형태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은밀한 갈등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중이다. 과거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상적인 테제는 운 좋게도 아주 특출난 이들에 의해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그럴 재능이 없거나 여력이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취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논리는 사고의 편협함뿐 아니라 현실의 혹독함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아니, 나로서는 이라고 해야 할까. 새로운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예술이 소비되는 방식이 갈수록 식민지적 착취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개선될 여지 또한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예술 접근 방식은 향유에서 소모로 전환된 지 오래다. 소위 ‘교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일종의 가상이 풍족한 나의 일상을 만들어 주는 스펙이 되고, 조금 더 괜찮은 삶, 물질적인 삶과 영적인 삶 모두를 양손에 쥘 수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정교한 장치가 됐다. 그것이 현재의 세상을 반성 없이 긍정하도록 만든다. 옛날의 예술에 닳아빠진 언어를 덧붙여 신선한 척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거스르지 않으며 미끄덩하게 빠져나가는 배설이다. 전통은 그런 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제 유지에 효과적일 뿐이다.

 이것이 내가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지지하는 이유다. 전통보다 빠르고 강하게 현대 담론과 주류의 비위를 상하게 만드는 일, 생산적인 일상보다 비효율적인 낭비로 충격을 던지는 일. 의심하고, 회의하고, 계산을 부정하는 일. 설령 그것이 기존의 설명을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더라도, 진리로 받아들여진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 보통은 어설픈 솜씨로 되지도 않을 괴작을 서투르게 내놓는 것으로 귀결되는 이런 종류의 일들이 적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2* 음악 말고 음학

p.35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삭막한 깨달음, 의미 없는 게임에서 장기돌은 모두 사용되었고, 위대한 사상은 모두 다 이미 생각되었으며, 가능한 발견은 이미 다 구상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인간은 ‘순응’을 통한 자기 유지에 꽉 붙들려 있다는 이 삭막한 깨달음은 자신이 비난하는 환상적 지혜만을 재생산할 뿐이다.


p.102 서구 음악은 모두 문명 속에서 노래가 처한 모순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은 동시에 모든 예술 음악이 심금을 울리는 힘을 갖도록 만들어준다.


p. 134 그러나 동시에 이성은 ‘계산적 사유’의 기관이 되는데, 이러한 사유는 자기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세계를 조정하며 단순한 감각적 재료들을 복속되는 재료들로 만들기 위해 대상을 마련하는 기능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전통이냐 진보냐 하는 양자택일 유의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머리로 계산하는(것처럼 들리는) 음악이냐, 가슴으로 우는(것처럼 보이는) 음악이냐 하는 것. ‘음학이 아니라 음악이다’라는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나에게는 음학이기도 하다. 머리로 만드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나에게 있어 계산과 측정과 측량으로 만드는 음악은 새로운 소리를 찾는 노력의 일환이다. 여기엔 칙 코리아의 유명한 전언이 한몫을 하는데, ‘너는 오직 네가 들은 것만 연주할 수 있다’.라는 그것이다. 이 말은 청각적인 영감에 의지하는 한 기존의 소리와 비슷한 궤를 반복하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지처럼 다가왔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기는 하나, 나는 청각적 영감 대신 수나 언어의 규칙, 알고리즘으로 멜로디와 리듬을 생산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다. 그 역시 기존에 있는 곡과 연주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나, 어쩌면 잠시라도 생길 그 불일치, 혹은 여백에 나와 같은 종류의 뮤지션들이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3* 사이렌과 녹음기

p.59 인간은 기계적으로 기대되는 인습적 반응과 기능들이 모이는 지점으로 축소된다.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


p.80부터 시작되는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 챕터 전체에 대하여​


 *오디세우스에게 녹음기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마스트에 묶을 것을 지시하고, 부하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은 채 노를 저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을 일이지만, 만약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항해의 양상은 완전히 변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황홀해 했겠지만 다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몹시 절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다. 비록 라이브(?)는 아닐지라도, 사이렌의 노래에 대한 부하들의 궁금증은 상륙 뒤에 찾아올 감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변모했을 테니 배는 훨씬 더 일찍 항구에 도착했을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제일 굴욕적인 존재로 추락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사이렌이다. 그들은 노래를 통해 존재했고-또는 타인에게 인식되었고-그 노래는 타인을 파멸시키는 기능으로서 보존되어 왔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가 녹음기를  통해 육지에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면? 노래는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매혹하겠지만 노래의 원래 주인인 사이렌의 존재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을 당한다. 차라리 오디세우스에게 조롱 당하고 죽는 일로만 끝났다면 다행일까. 사이렌이 죽는다고 해도 기계는 죽은 자를 영원히 조롱하며(너희의 노래는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쓸모없다) 작동할 것이다. 언젠가 사이렌의 노래에 질린 사람들이 정지 버튼을 멈추어서야 조롱은 간신히 정지한다. 이것이 기술이 존재를 파괴하는 방식이다.


*4* 우리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 것이 맞는가?

p.181 잔혹한 세계 속에서 ‘행복한 삶’이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몰염치한 것이다.


p.187 대중에게는 각계각층을 위해 다양한 질의 대량 생산물이 제공되지만 그것은 양화의 법칙을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p.188 가치의 유일한 척도는 얼마나 이목을 끄는가 또는 얼마나 포장을 잘하는가에 달려 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가요를 잘 듣지 않는다. 리듬이나 그루브, 화성 진행이 재즈와 달라서는 아니다. 더욱 솔직히 얘기하자면 가사 때문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말장난, 많이 벌어서 많이 소비하고 많이 가진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삼는 배금주의, 아닌척하면서 오히려 그 지향점을 강화하는 내러티브, 도무지 요점을 파악할 수가 없는 요상한 소위 ‘스웩’이라 불리는 것들.

 이것은 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 이제는 가장 큰 소비력을 행사하는 젊은 층이 더 이상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그들과 감정적인 교집합을 가질 수 있는 연령대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탈락한 것이며, 앞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굳어버린 회색빛 시선의 어중간한 기성세대. 그렇다면 나는 기쁘게 내가 늙다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고루하며 매사에 아니꼽고 생각이 닫혀서 도무지 새로운 것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퇴물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음악에는 삶이 부족하고 진실성이 모자라다. 소위 핍진성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위풍당당하고 문제 해결에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 진취적인 인간들의 군상이 여기저기에 산개해 있지만, 삶의 한순간마다 고비를 넘기듯 숨을 간신히 쉬는 수많은 이들의 초상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의 노래는 모두가 아무런 문제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현재를 긍정하라고 강요하며 만약 생길 수도 있는 인생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라고 은밀하게 등을 떠민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음악이 맞는가?


*5* 재즈에서 즉흥연주를 위한 기술적 단련의 의미

p.191 음악에서는 감미로운 개별 효과가 전체 형식에 대한 의식을 무디게 만들며, 회화에서는 전체적 구성을 희생시킨 채 개별적인 색깔만이 강조되고 소설에서는 개별적인 심리 묘사가 전체 구조보다 더 중요시된다.. (중략) 전체란 부분들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상실하게 되어 전체란 모든 것을 성공담을 위한 사례와 전거로 끌어들이는 성공한 사람의 인생 여정 비슷한 것이 된다.


p.195 오슨 웰스가 상업의 관례를 어겼을 경우 그러한 규범 이탈은 체계의 유효성을 더욱 강하게 확인시켜주는 계산된 돌연변이로 간주되기 때문에 용서받는다.


p.196 다루기 힘든 소재에 대해 더 이상 실험해 볼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문화 산업의 양식은 동시에 양식의 부정이다.


p.197 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매끈하고 완전한 양식을 구현한 사람들이 아니라 카오스적인 고통의 표현에 대항하기 위한 강인함으로써, 즉 양식을 ‘부정적 진리’로서 작품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중략).. 고전이라고 불리는 저 예술 형식들은 그들이 구현한 양식과는 다른 무엇이고자 하는 객관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p.198-199 위대한 예술 작품의 양식에 옛날부터 자기 부정에까지 이르는 좌절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면 열등한 예술 작품은 ‘동일성’에 대한 대용물로서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에 매달린다.


 *오늘날의 재즈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선배 뮤지션들이 갈고닦아온 기량을 학습하고 익히는 데에 여념이 없다. 특히 찰리 파커 이후 모던 재즈의 융성기를 거치면서 뮤지션들의 자의식과 정체성 확립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아 남들이 하지 않았던 음악을 새로이 발견한다는 일면 모순된 명제가 진리로 받아들여지면서 소위 랭귀지(language)라고 하는 재즈의 어법을 학습하는 일이 대다수 뮤지션들의 연습 재료가 됐다. 맥코이 타이너가 이 곡에서 이런 식으로 보이싱을 잡았고, 콜트레인이 어떤 모션으로 즉흥연주를 풀어나갔으며  토니 윌리엄스가 어느 곡에서 그루핑 연주를 했는지, 제리 버건지가 어떤 컨셉으로 아웃 사운드를 구축해 나갔는지 분석하는 일. 여기에 수천 곡이 넘는 스탠더드를 외우는 것까지 더한다면 재즈 뮤지션들은 임종 직전까지도 해내지 못할 과업을 부여받은 셈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을 과거의 유산에 집착하는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분명 새로움의 탄생은 옛것에도 일정 부분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이런 일을 밀여 붙여야 할까. 이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원곡은 사라지고 기술만 남아있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과 기술로 중무장하고자 벼르던 각오가 음악의 향취를 지우고 일종의 형식론으로 변태하여 목적 없이 벼려져 있는 칼날처럼 고립되는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사실은 그것이 실패다. 춥고 어두운 어느 곳에 끝내 완성되지 못한 발명품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다.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용기와 음악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당한 듯한 박탈감이 공존하는 그 지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음악가의 특권처럼 보이는 배타적 경계에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작품 혹은 예술가의 아우라를 모방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조차 커다란 에너지를 요구한다. 결말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연습하고 작곡할 뿐이다.


*6* 나는 거부한다.

p.208 후기자본주의에서 유흥은 일의 연장이다. 유흥을 찾는 사람들은 기계화된 노동 과정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기 위해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람들이다.

p.215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 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을 영원한 소비자로서, 즉 문화 산업의 객체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 체계의 원리다.


p.219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중략).. 오락이 약속해 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


p.285 편집증 환자는 외부 세계를 자신의 눈먼 목적에 일치하게끔만 지각함으로써 추상적 집착에 지나지 않는 자아를 항상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p.302 현대인은 사물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고도 몇 개의 사유 모델에 의해, 또는 언어가 붕괴된 후 그때그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비상 휴대 식량이 된 기술적 용어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


p.377 '지나침‘의 위험을 알고서 지나침에 대해 현명하게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이 추천한 것은 어떤 것이든 일단 불신을 한다.. (중략).. 질이 떨어질수록 호언장담은 커진다.

 *나는 거부한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SNS를 통해서 단 한 방의 효과를 보장하는 사람들, 어설픈 언어로 지식을 소지품처럼 다루는 사람들, 근거 없이 괜찮다고 다독이는 말들, 자존감 장사꾼들. 모두 거부한다. 우리의 영혼은 상처를 완벽하게 수리받을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한 번 있었던 일은 영원히 있는 일이 된다. 없는 것으로 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러니 자꾸 괜찮다고 얘기하는 짓은 그만두고 분노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7* 그때나 지금이나.

p.259 종교적인 원초 감정과 신흥 종교들을 수많은 혁명의 유물들과 함께 시장에 쌓아놓고 파는 사회,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익숙하게 돈을 세는 동안 파시스트적인 지도자들이 문을 닫아 건 밀실에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거래하는 사회, 사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이 어떤 하나의 정파를 선택하라는 권유로서만 정당성을 인정받는 사회, 정치는 장사가 되고 장사는 순전히 정치가 되는 사회.. (후략)..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변증법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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