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B 진범 Readen Jan 14. 2017

다르고 다퉈서 달라진 인간에 대해

조너선 화이트 - <바른 마음> 리뷰

인간은 이렇게 다르고, 싸우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답변을 사회과학에서 찾기는 그나마 쉽다. 1) 개별적 이익의 선택이 결국은 사회적으로는 연합을 도모했을 것이라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기반한 설명, 2)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로부터 개인 의 보호와 사회에 대한 충성을 교환했다는 홉스의 사회계약설, 3) 인간은 자연상태에 있어서 동일했으나 신체적, 우연적, 자연적 차이에 의해서 잉여가 생겨나 불평등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의지 총합 이상의 일반의지를 담은 사회가 생겨났다는 루소의 사회계약설 4) 자연권의 확장과 보호주체로서 사회를 발견하고 그 사회의 추종자이자 담지자로서 개인을 발견한 로크의 사회계약설등등 이 질문에 답하는 사회이론은 지금도 발전 중이다.  

 궁금한 것은 그 이외의 것이다.  누군가를 뒤통수쳐 먹이를 획득하여 배고픔을 해결하면 행복했던 그런 때부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때의 모습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때의 모습이 각인되어 또 싸우고 있다 말한다. 



 동물로서 인간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 이롭다는 말 우선은 동의한다. 우리는 결코 역행하지 않는다(가끔은 2016년의 한국처럼 샤머니즘이 부활한다). 다만 이 책은 현대사회보다 훨씬 길었던 동물로서 인간의 서사에 주목하고 있다. 그 서사가 우리에게 뭔가 남겨놓지 않았을까. 어떤 국면에서는 어쩌면 저렇게 동물을 닮았을까 하는 모습이 보이는 반면 어떤 국면에서는 다른 동물은 개별 유기체로서는 하지 못할 위대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행태를 유전자와 문화, 선천적과 후천적, 타고남과 학습 등등으로 구분하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그 구분 사이에는 빈 값이 있다. 이 빈 값을 이 책은 채워나가고 있다. 구분값은 서로 관여한다. 인간이 타고난 것은 학습되어 바뀌기도 하고 그것이 다시 유전되기도 한다.  특정 국면에서는 그것이 선택되어 유전자로 남는다.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소신으로 삼기도 하고 그것을 인생 목표로 삼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것만으로도 산다고 느낀다. 그런 것중 하나가 정치다. 이 책은 인간의 정치 행태를 동물이었을 때부터 있었던 본능의 확장판으로 설명한다. 그 본능은 여섯 개이며 개별 유기체 인간의 유전자적, 환경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서 어떤 것이 더 혹은 덜 발달할 수 있다. 이 본능의 발현에 따라 우리 중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진보가 되기도 보수가 되기도 무당층이 되기도 한다. 절대 이해하지 못할 존재로 보였던 다른 인간을 이해를 할 수 있는 지점이 열린다.  (여섯 개 본능의 이름은 (1) 배려/피해 기반, (2) 공평성/부정 기반, (3) 충성심/배신 기반, (4) 권위/전복 기반, (5) 고귀함/추함 기반, (6) 자유/압제 기반이다)


이제 누군가의 지지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삼가야겠다.   이해를 아직 못 했다라고 해야겠다.


 정치 말고 이 책이 주목하는 인간의 행위가 있다. 종교다. 어떤 이는 존재하는 것의 기능을 강조하는 진화론의 설명 체계와 다르게 종교는 우연이며 수 많은 방해에도 살아남았다며 폄하하기 바쁘다. 어떤 이는 종교는 우연이지만 그것이 유용해 살아남았다며 진화론의 설명 체계를 따른다. 이 설명 역시 오류에 의해서 종교가 발견되었다며 종교를 조금 폄하한다. 하지만 종교의 발견만 어떻게 수많은 인류의 발견과 우연을 제치고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해 무언가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그것은 정말 우연의 연속일건가. 이 책에서는 종교를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본능에 의해 발현된 확장판으로 본다. 종교의 초기 모습은 본능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이는 다시 종교로 발전되었고 이 발전된 종교가  사회 유지에 적합했기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세계 종교가 아니라 원생적 종교에서 그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는데 결론은 이렇다. 원생적 종교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간 개별뿐만 아니라 인간 종에게 유리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선천적인 유전자에 인간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설명은 인류를 바꾸기 어렵다는 설명으로 들린다. 학습과 후천성을 강조해야지 세상이 바뀔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도 절대 안 바뀌는 사람이 많다. 그들을 배제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세상이 바른 것일까? (일단 편하기는 하려나?) 문제는 세상이 너무 작아진다는 데에 있다. 다른 세계에 저 많은 사람은 왜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약자의 인권이 확대되기를 갈망하는데 이것이 틀린 것일까? 왜 다른 누군가는 한만큼 가져가라하며 약자는 약자인 이유가 있다며 단죄하는 것일까? 나의 정의는 맞는데 저들은 왜 저럴까? 종교는 왜 있는 것일까? 만날 다투며 비종교인을 괴롭히는(?)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다면 이 물음을 다르게 던지며 이해하는 방법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좁았던 세상이 조금은 커지리라 믿는다. 인간은 다르다. 그래서 싸운다. 그러므로 발전했다. 그것이 사회에 남았다. 그래서 또 다시 싸운다. 

작가의 이전글 소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대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