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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비 파크 Apr 08. 2022

낮술과 페어링

적극적으로 호사를 누려보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얼마 전 투룸 전세집 계약을 했다. 계약서를 쓰던 날 임차인 할머니와 공인 중개사 아저씨도 있었다. 떨리는 계약서 싸인을 마무리 하고 약간의 담소를 나눴다. 집주인 할머니는 입사 한지 오래 되지 않아 어쩜 이리 큰집을 얻었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저축을 열심히 했다고 답했다. 사실은 은행과 회사 대출을 풀로 땡겨 전세금을 마련한거였지만,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 귀찮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좋게 보시며 칭찬했다. 


“그래 역시 아낄 줄을 알아야해. 그래야 돈 귀한 것도 알고 잘살지. 청년이 아주 보기 좋네!” 


할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보이셨다. 조금 민망한 칭찬이었다. 그러자 공인중개사 아저씨는 뜬금없이 한마디를 얹으며 대화에 난입했다. 


“아니 근데 말여. 아끼는 것도 좋은디 재밌게 잘 쓰고 살아야 혀. 나는 우리 자식들 한테 저얼대 돈 아끼라고 안혀. 무조건 쓰고 재밌게 살라고만 허지” 


아저씨는 욜로족이었다. 순식간에 탁자는 썰전이 되었다. 나는 얼떨결에 김구라가 되었다. 우선, 할머니의 의견을 먼저 경청해보았다. 할머니는 지금 시대 청년들은 아낄줄을 모르며 미래를 대비하는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일리가 있었다. 그리곤 아저씨의 반박도 이어졌다. 인생은 즐기기에도 짧다는 말이 이어졌다. 팽팽한 대결이었다. 그 어느쪽도 굽힐 태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토론은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듯 보였으나, 나는 약속이 있다는 말로 둘러대며 전쟁통을 빠져나왔다. 좋은 토론이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할머니의 말을 되짚어 봤다. 아끼는 것은 좋다. 욕심같아서는 나도 더 아끼면서 저축의 비중을 늘리고 싶었다. 언젠가는 하게 될지도 모르는 결혼을 위해 자금 마련을 해놓고 싶다. 지금 먹고 싶은거 좀 덜먹고 하고 싶은거 덜하면 미래에는 원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좀 빡빡하겠지만 미래는 원활해 질 것이다. 아끼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아저씨의 말도 되짚어봤다. 지금 아낀다고 미래에 내가 정말 행복할까? 지금의 희생은 미래의 확실한 행복을 보장해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할머니의 말과 아저씨의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싸웠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할머니의 말도 나고, 아저씨의 말도 나다. 나는 할머니 이기도 하고 아저씨이기도 했다. 나는 두사람의 모습을 모두 가졌다. 


그치만 하나를 꼭 택해야했다. 두 토론자 중간에서 심판이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할머니의 손을 들려다… 결국은 공인중개사 아저씨의 손을 들어줬다. 지금의 행복을 더 적극적으로 온전히 사수하는 쪽을 택했다. 나는 지금의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행복하고 싶고 미래에도 행복하고 싶다. 공인중개사 아저씨는 박빙의 승부에서 간발의 차로 이겼다. 윤석열 처럼.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고 싶지 않다. 나는 늘 행복을 최대한 끌어쓰고 싶다. 누군가 내게 행복이 뭔지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낮술과 페어링’이라고 답할거 같다. 내가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낮술과 페어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호사를 누렸던 날이 있었다. 


뜬금없이 금요일 오후 반차를 썼던 어느 날, 청담동 컨템포러리 중식당에 갔었다. 우리는 인당 5만원짜리 런치 오마카세를 주문했고, 그날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뉴질랜드산 다렌버그 와인도 챙겨왔다. 콜키지 프리인 것이 새삼 행복한 날이었다. 오크향이 은은하게 나는 와인은 약간 기름진 중식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훌륭한 페어링을 선보였다. 모두가 일하는 낮시간에 고요하게 취하니 기분이 붕떴다. 


식당에는 평일 낮시간이라 손님이 정말 없었다. 그 넓은 레스토랑에 세개 정도의 테이블에만 사람들이 있었던거 같다. 뭔가 개발자 처럼 생긴 돈많아 보이는 두 청년들. 그리고 중견배우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는 사모님들의 테이블.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낮 시간을 우아한 수다로 채우며 낭비하고 있었다. 한창 근무하고 있을 시간에 흘러가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나의 행복은 낮술과 페어링이었다. 


행복한 탕진이었다. 한끼에 5만원을 시원하게 썼다. 주중의 날들을 업무로 꽉 채우고 잠시나마 맞는 망중한이었기에 더 달콤했다.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있는 과감하고도 소심한 호사였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가진 한도 내에서 최적의 손익분기점을 찾아 소비의 재미를 꾸준히 챙겨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싼 것의 가치를 알고 나의 한도 내에서 만끽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얻기위해 열심히 돈버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아끼다보면 소중한 것을 잃고 살지도 모른다. 적당한 사치는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되기도 한다. 좋은 소비 경험은 근로와 창작 의지를 북돋아주며 새로운 영감을 스스로에게 주기도 한다. 잘쓰는 사람이 잘 벌줄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을 최대로 즐겨보려고 한다. 늘 적극적으로 호사를 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나의 행복은 낮술과 페어링이다. 더 높은 빈도로 호사를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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