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매년 음력 1월 1일 조계사를 가는 루틴이 있다. 친구 A와 나는 매년 조계사에 가서 소원을 빌고, 신년 계획을 공유한다. 우리의 종교가 불교라서 매년 가는것이 아니다. 3년전 쯤 우연히 종로에 놀러 갔다가 조계사에 갔고, 재미로 소원을 빌었다. 신기하게도 매년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시점부터 조계사에서 소원빌기는 꼭 해야하는 새해 루틴이 되었다.
제작년 친구가 조계사에서 빌었던 소원은 근무지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다. 친구는 당시 여수공장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공장의 거친 분위기도 맞지 않았고, 객지 생활도 힘들어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라온 친구에게 여수는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계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사내 잡포스팅에 지원해 합격해서 서울 근무지로 옮기게 된 것이다. 본사 인재개발팀으로 이동하게 되어 그토록 원하던 서울 근무지를 얻게 되었다. 제작년 초쯤, 우리 둘다 서울 근무지의 꿈을 이룬 기념으로 함께 사원증을 들고 해맑게 셀카를 찍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는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했고, 밤 9시나 10시 쯤 퇴근을 했다.
업무도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공대 출신인 친구는 매일 같이 숫자 대신 글자와 씨름해야 했다. 새로운 팀인 인재개발팀은 기업 문화 피피티 제작과 영상 편집이 주업무였다. 인재개발팀은 스스로의 인재를 갈아 넣어 인재로 만드는 팀이었다. 팀장이 요구하는 대로 피피티를 수정하다 보면 어느새 늦은 밤이 찾아왔고, 다음날 새벽 일찍이 출근해야 했다. 그래서 작년에 친구가 조계사에서 빈 소원은 직무와 팀을 바꾸는 것이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이동하는 친구를 보며 누군가는 끈기가 없다고 말할수도 있겠다. 남들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에 다니면서 불만이 왜 그렇게 많은지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의 진짜 고민은 사실 회사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고민이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에 대한 단순한 투정이 아닌, 좀 더 고차원 적이고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친구는 사실 어렸을때부터 시키는 것을 정말 잘해내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를 잘해서 자사고에 진학했고, 소위 말하는 SKY대학을 갔다. 대학 다닐때는 모든이와도 두루 잘 지냈고 동아리 활동도 잘했다. 학점도 잘 받았고 졸업후에는 모두가 알만한 대기업에 들어갔다. 한국사회에서 많은이들이 말하는 ‘괜찮은 인생’의 길을 걷고 있었던거 같다.
그런데 친구는 그 과정에서 많이 힘들어했다. 대학교때까지는 시키는 대로 잘하면 됐는데, 졸업후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이제 더이상 시키는 것만 하는 나이는 지났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의 취향 조차도 잘 몰랐고,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잘 몰랐다. 어떤 선택을 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설계해야할지 공포감이 가득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도 면접관이 인사팀으로 발령내도 괜찮겠냐고 물어서 인사팀으로 합격이 된거였다. 인사 직무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친구는 나에게 종종 고민 상담을 했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는 그때마다 친구에게 힙합이 내게 알려준 조언을 그대로 해주었다. 허쓸, 킾잇리얼, 셀프메이드. 스스로 만들어가는 인생이 소중한거라고. 지금이 우리 인생의 분수령이기에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친구는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친구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작년 9월 쯤이었던거 같다. 친구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 1년간 팀에서 힘든 내색 한번 내지 않던 친구가 팀장에게 드디어 솔직한 생각을 말한 것이다. 더이상 일이 안맞아서 못하겠고 팀을 옮기고 싶다고 킾잇리얼 한 것이다. 팀장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고 한다. 그 후 친구는 바로 인사팀장을 찾아가 직무를 바꾸고 싶고 팀을 이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의 성격을 알고있는 나로써는 그때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친구는 퇴사를 각오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한 것이다. 10년 동안 보아온 친구의 모습 중 가장 멋져보이는 순간이었다.
스스로에 운명을 개척한 것에 대한 기특함 때문이었을까? 결국, 조계사는 그의 소원을 또 들어주었다. 친구는 올해 초 해외영업팀으로 발령이 났다. 친구의 소원은 매년 달라졌지만 어쩌면 늘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30대 초에서 중반을 달려가는 나와 친구는 주체적인 삶을 통해 점점 진짜 어른이 되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삶은 이제 진짜 시작이다. 우리는 더 멋지게 나이들어 간다. 앞으로 우리가 조계사에서 빌게될 소원을 무엇일까. 끝없이 소원을 빌고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