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비 파크 Dec 13. 2022

투두리스트 중독자가 된 건에 대하여

메모를 통해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술


오늘도 나는 노란 리갈패드에 투두리스트를 적는다. 무인양품 펜을 들고 연도와 날짜부터 정갈하게 적는다. 그리고는 불렛포인트를 찍고 중요한 일부터 써내려간다. “트렌드 코리아 250쪽까지 읽기” “출근할 때 블루투스 키보드 챙겨가기” 등등. 꼭 빼먹으면 안되는 것들부터 적는다. 그리고는 정말 사소한 것까지도 적는다. ”키츠요지 새로나온 앨범듣기“와 같은 것들. 오늘 하루도 투두리스트를 지워 나간다는 생각에 도파민이 분비된다.



투두리스트를 적게 된 계기는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연애를 하다보면 하루종일 시시콜콜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습관과 루틴까지 어느새 나에게로 옮아오게 된다. 여자친구는 자칭 Power J(mbti)형 인간이다. 했던 일과 해야할일들을 다이어리에 부지런하게 적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다. 평소 메모하는걸 좋아하는 나는 그렇게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장인인 여자친구에게 스며들었다. 나도 덩달아 다이어리에 조금씩 더 적다보니 어느새 매일같이 투두리스트를 적게 된 것이다.


그렇게 투두리스트를 적다보니 이건 어쩌면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것 저것 불안감이 커져갔다.아버지 사업은 어려워져 빚이 생기고 내 월급으로 그 빚을 갚아야 했다. 자취 전세집 이자는 높아진 금리 때문에 부담이 더 커지고 있었다. 이건 내가 그리던 30대 초반의 모습이 아니었는데. 불안감을 비우기 위해 나는 뭐라도 더 해야했다.



투두리스트는 불안을 희망으로 바꿔갔다. 투두리스트를 달성해나가면 당장의 불안감이 사라졌다. 아침이 되면 오늘의 할일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만들어냈다. 수익을 내고 있는 블로그 포스팅 꾸준히 하기, 브런치에 올릴 글 쓰기, 운동하기 등등. 내 투두리스트는 그렇게 생산성 있는 일들로 채워져갔다.



투두리스트를 더 재밌게 만들기 위해서 나름의 양념을 첨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사소한 일들도 목표로 잡았다. ”저녁에 삼전동 부귀포차에서 치킨먹기“ “주말에 여자친구랑 전시보러가기”와 같은 아주 사소한 일들도 목표로 잡았다. 이런 시덥잖은 투두리스트들도 달성해나가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잡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내 투두리스트에는 생산적인 일들과 비생산적인 인들이 공존한다. 그래서 재밌다.




자기전에 오늘 계획했던 일들을 투두리스트를 통해 둘러본다. 빨간색 무인양품펜을 들고 수행한 일들을 체크해나간다. 나는 이때 느끼는 쾌감이 참 좋다. 목표한 것들을 지워나가면 잔잔함 뿌듯함과 성취감이 내것이 된다. 오늘 하루도 헛된 하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다. 자칫하면 그냥 흘러갈 시간들을 알차게 채운 것이다. 이 하루들이 모이면 밝은 미래의 열매로 맺게 될거라는 긍정적인 희망도 품어본다. 침대에서 두발뻗고 잘 수 있게 만드는게 투두리스트의 가장 큰 순기능이다.




이번주에 오랜만에 mbti 검사를 해봤다. 거의 2년간 INFP만 나오던 나는 처음으로 INFJ가 나왔다. 나는 아직 꽤 즉흥적인 사람이지만 투두리스트를 통해 다시 계획적인 삶을 살고 있다. 투두리스트를 통해 나는 행복을 계획하며 살고있다. 불안할때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뭐라도 해야지. 하루를 꽉차게 사는 재미를 느끼며 사는 지금이 좋다. 오늘도 투두리스트를 써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