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이
1
햇볕이 따뜻한 아침 루실라는 그 밝은 빛에 눈을 떴다. 창가에서 비추는 햇살이 방안을 비추자 방안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어제 늦게까지 친구들과 떠들썩한 밤을 보낸 끝에 집에 와 바로 잠들어 버린까닭에 엉망일 수도 있었지만 루실라에겐 그가 있기에 여전히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흐리게 눈을 뜨고 탁자 위에 있는 조그마한 시계를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늦게 잔 만큼 늦게 일어났겠지만, 웬일인지 아직 학교에 가기엔 이른 시간인데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하지만 딱히 손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더 길어지니까. 특히나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면 오늘은 아침을 즐기는 데 별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별문제가 있을까?'
현대인들은 많은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가지만 처음부터 풍족하기만한 그녀에겐 딱히 걱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나이도 그리 많지않았고 외모또한 에이전시에서 모델섭외가 번번히 들어올만큼 뛰어났다. 대학또한 누구나 한번쯤 들어볼법한 명문대에 전공또한 건축관련 학과여서 어딜가도 대접을 받았다. 물론 그녀가 건축에 꿈이있어서 전공한것은 아니었다. 그저 취미로 전공하고 있는 건축학은 앞으로 추가될 자신의 집을 조금더 아름답게 꾸미거나 좀더 많은 돈을 투자해 새 건물을 짓는 데 있어서 자신의 취향을 일꾼들에게 설명하는 정도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선택한 과목일 뿐이었다.
새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좋은 꿈에서 깬듯 기분좋게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바라 보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주변은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나무만이 얕은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잠시 바람을 감상하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듯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체 잠옷 바람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그건 지하로 연결돼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개인 와인저장고였다.
와인저장고는 대략 30종이 넘는 와인들을 저장할 수 있게 맞춤설계되 있었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와인부터 희귀한 와인까지 그녀는 많은 종류의 와인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와인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루실라는 그중에서 위에서 세 번째 칸 중 15번째에 있는 와인을 하나 꺼내 들었다.
'희귀한 와인...'
희귀한 와인이 한 병씩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컬렉션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그녀는 건축보단 와인에 좀더 심취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것쯤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에 보이는 유리병을 하나 꺼내더니 대충 따르기 시작했다. 와인에는 '샤토 파비' 라는 라벨이 붙어져 있었다.
병에 따른 와인이 이내 은은한 향을 내기 시작하면서 미세하게 산화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을 가볍게 비우더니 이내 다시 한잔을 따랐다. 언제나 그렇지만 일어나자 마시는 싱그러운 와인은 그녀를 기분 좋게 해준다. 하지만 저장고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내 쌀쌀함을 느끼고선 그곳을 벗어나 위층으로 향하였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야."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유리병을 한쪽에 두고선 가운을 벗었다. 속옷 차림의 그녀의 실루엣은 예상했던대로 마니킹같은 비현실적인 곡선으로 치장되 있었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약간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었는데 바닥의 외각 쪽은 월넛을 사용한 고급 목조로 둘러져 있었고 중앙 부분은 두꺼운 유리판으로 돼 아래쪽 집안 내부가 보이는 입체적 구조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부분은 그 두꺼운 유리판을 사용한 수영장이었는데 물 안에 들어가서 집안 내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이 널따란 수영장은 물이 담겨있는 넓이만 해도 20평 남짓됐으며 그녀는 이 집을 작년에 완공해서 지금은 그녀의 두 번째 거처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본집은 피렌체에 있었다.
이렇게 부족할것 없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좀처럼 환락과 유흥거리를 찾아 돌아다니지는 않았는데 그녀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까탈스런 아버지 때문이었다. 엄격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술을 멀리하고 남자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언제나 신신 당부했다. 물론 마약을 비롯한 각종 놀음이나 유흥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이런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던 건 순전히 자신의 아버지 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거를 수는 없었지만 특별히 와인만은 예외로 하는 게 아버지와의 거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사업체의 오너로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거대재벌이었다. 그녀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처럼 지낼 수 있는 것은 당연 그녀가 그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것도 능력 비슷한거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끔 뉴스를 보면 여러 가지 돈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눈에 띠긴 했지만 그건 그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다.
곧 몸이 따뜻해지자 그녀는 수영장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서서히 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발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찰랑찰랑한 물의 감촉은 살며시 그녀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물속으로 인도했다. 처음엔 차갑게 느껴지던 수영장의 물도 따스한 와인의 온기가 더해지자 결국은 그녀를 기분좋게 해주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 남자는 시간이 지나자 슬슬 조바심이 났는지 걸음을 제촉하며 수영장쪽으로 다가왔다. 걱정스러움이 살며시 선을 넘으려 할 때쯤 수영장 반대쪽으로 머리를 내민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손인사를 건냈다.
"아가씨 아침부터 기분이 좋으신가 보군요."
긴장했던 티를 감추며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밌다는 듯 일명 자신의 집사를 향해 미소를 띠었다.
"전 언제나 기분이 좋아요. 오늘은 그저 더 좋을 뿐이죠. 잠은 잘 주무셨나요?"
"물론입니다. 언제나 아가씨 덕분이죠."
남자에게 차를 건네받은 그녀는 물속에서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마시는 차는 '로네펠트'로 다즐링 홍차 베이스의 얼그레이였으며 이역시 고급에 속했지만 역시 그녀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오늘도 그녀의 집사는 그녀를 위해 차를 내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몇 번 더 수영장을 가로지르더니 이젠 만족하다는 듯 수영장 밖으로 몸을 향했다. 그녀가 가운을 마져 걸치자 잠시 물러나있던 집사가 나타났다.
"아가씨 오늘은 어떤 거로?"
집사는 어떠한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금으로 도금된 아주 특별해 보이는 상자였다. 안쪽에도 역시 의미심장한 열쇠들이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S7"
이라고 말하며 2번째에 있는 키를 가르켰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약 5분가량이 지나자 루실라의 핸드폰이 불을 깜박이더니 아름다운 소리로 울어댔다. 핸드폰 소리를 들은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날씨에 어울리는 근사한 복장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컬렉션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거울을 보고 확인한 끝에 마음에 드는 옷을 결정하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끝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웬 주황색의 화려한 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차종의 이름은 'Saleen S7'으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차 중 중간가격의 차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엔진 소리와 위엄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차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면서 집사가 내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집사는 당연한 듯이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차에 태우려고 했지만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그녀가 그를 그냥 지나쳐갔다.
"오늘은 혼자 갈래요. 쉬세요."
그녀는 무심히 짧게 건네 말하고는 열린 차 문을 통해 차안으로 들어갔다.
"괜찮겠습니까?"
집사가 말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겠어요? 저한테? 집 잘 보고 계세요. 큰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연락하십시오."
"알겠어요."
차는 순간 일정한 굉음을 쏟아 내더니 곧바로 집사에게서 멀어졌다. 집사는 멀어지는 차를 보고는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별장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별장으로 들어간 뒤 창밖을 다시한번 쳐다 보았다. 그녀는 확실히 별장을 떠나고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집사는 이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딸은 학교에 잘 갔나?"
전화벨 넘어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물론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다만 오늘은 혼자 나가셨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뭘 잘못했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시던데요."
"그렇군. 가끔은 혼자도 돌아다니고 싶었겠지. 늘 자네가 붙어있으면 불편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혼자 보낸 건 아니겠지?"
그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언제나 가드들이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알겠네. 언제나 고맙군. 그럼 수고하게."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기가 끊겼다. 전화기가 끊기자 집사는 이번엔 다른 번호를 눌러 또다른 어딘가로 전화를 돌렸다. 벨 소리가 2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응답했다.
"전화받았습니다."
"아가씨께서 학교로 가셨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눈치 못 채게 행동하는 건 알지?"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언제나 눈치 못 채게 행동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편과 통화를 나눈 집사는 조용히 발코니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집사가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시간은 그녀가 없는 이 시간때가 유일했다. 집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뒷주머니에서 묵직해보이는 쇠라이터를 하나 꺼내들었다. 맑은 딸깍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었다.
"부자들이 착해지긴 쉬운 법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맑은 하늘을 향에 입가에 뿌연연기를 피워올렸다.